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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07/08/27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언론 시사 후기 (4)
  2. 2007/08/26 학벌 사회의 좀비, 연예인을 공격하다
  3. 2007/08/24 휴먼 판타지 <즐거운 인생> (1)
  4. 2007/08/22 러시아 기행 7. 에필로그
  5. 2007/08/22 러시아 기행 6. 사치의 끝장, 예카째리나 궁전
  6. 2007/08/22 러시아 기행 5. 푸쉬킨 시의 여름궁전과 분수
  7. 2007/08/22 러시아 기행 4. 빼쩨르부르그
  8. 2007/08/20 러시아 기행 3. 아르바뜨 거리와 전승기념관
  9. 2007/08/20 러시아 기행 2. 붉은 광장과 끄레믈, 노보제비치
  10. 2007/08/18 러시아 기행 1. 모스크바의 첫 인상 (1)
  11. 2007/08/18 씁쓸하지만 음미할만한 스펙터클
  12. 2007/08/07 <지금 사랑>에서 얻은 네 가지 교훈
  13. 2007/08/06 <디워>의 축하받을 흥행, 그러나...
  14. 2007/08/04 <사랑방 선수와 어머니>....웃기다 말고 울리다 말고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언론 시사 후기

휘뚜루마뚜루 영화리뷰 2007/08/2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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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않는다고 후진 영화는 아니다

"폭발적으로 웃겨 주는 부분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서....그게 좀 걱정이 돼요." 27일 서울극장에서 열린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언론 시사에 앞서 이 영화의 제작 관계자는 기자에게 바짝 타는 속내를 슬쩍 드러냈다. 명색이 추석용 코미디로 포장이 됐으니 관객들이 포복절도할 웃음을 기대할 게 뻔한 노릇이다. 배꼽의 소유권을 주장할 이유 없으니 제발 빼가슈~ 하며 자진 무장해제하고 나설 관객들의 웃음보를 산산조각낼,  그런 영화로 탄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비교적 자명한 것이다.

게다가 감독 김상진이 누군가. <주유소 습격 사건><신라의 달밤><귀신이 산다> 등을 통해 코미디 영화로만 '전타석 홈런'을  날린 몇 안되는 충무로 감독이 아니던가.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 시네마서비스는, <밀양>을 제외하고는 <아들>과 <황진이> <므이>, 최근 개봉한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까지 이렇다할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터이니, 시네마서비스의 해결사 김상진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례적으로 언론시사에 강우석 감독이 직접 참석한 것만 보더라도, 이번에도 그가 특유의 '한방'으로 구원투수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안팎의 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는 절묘하다. 따라서 그 자체로 웃긴다. 세 명의 루저가 절박한 심정으로 잘나가는 국밥집 할머니를 납치했는데, 네 명의 자식들 나몰라라 하는 데 분개한 나머지 할머니가 알아서 납치극을 사주하는, 기가 막힌, 그래서 매우 영화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이야기의 기본 얼개는 원작이라 할 수 있는 덴도 신의 일본 소설 <대유괴>에서 따온 것이니, 김상진이 이 기가 막힌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얼마나 센 웃음 폭탄을 장착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납치된 이가 납치범들에게 훈수를 두고 있는 상황 자체가 이미 코미디로써 절반은 먹고 들어갔으니 여기에 김상진의 유머 감각이 얹히면 극장이 떠나가라 할 것임은 안봐도 뻔할 것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앞서 제작 관계자의 우려대로 나로선 속 시원히 웃을만한 장면이 많지 않으니 슬슬 안타깝기 시작한다. 물론 아주 안웃긴 건 아니지만, 이 영화의 광고 카피대로 '전신작렬 배꼽폭발'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배꼽이 빠지려다가 곧잘 다시 들어가니 괜시리 서운했던 것이다. 왜 그럴까? 권순분 여사와 납치범들 간의 파열과 역할 전도로 이어지는 과정의 웃음이 예상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원톱 주연으로 나선 나문희 여사에 대한 과중한 존경심 때문이었을까? 납치범 세 명 가운데 유해진 빼고는 강성진과 유건, 그리고 경찰 역의 박상면은 슬슬 수위 조절하는 분위기다. 설정 자체로 잔뜩 기대가 부풀었는데, 인물들 사이에서 코미디 캐미컬을 창조해내야 할 김상진은 잽만 던진다. 여간해서 <귀신이 산다>의 차승원이 울며 불며 언덕길을 도망쳐 내려올 때와 같은, 회심의 어퍼컷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히든 카드가 없지 않다. 포스터에 나와 있지 않은 인물, 보도자료에도 안나오는 배우, 박준면이 이 영화의 코미디적 히든카드라 할 수 있겠다. <삼거리 극장>에서도 호연을 펼친 바 있는 그녀는, 이번에 약간의 특수 효과에 의해 거구의 여인으로 변신, 권순분 여사와 세 납치범으론 살짝 역부족인 한방 웃음을 보충해 준다. 그래도 외모를 가지고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이 그리 세련돼 보이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코미디 영화가 크게 웃기지 않다고 말하면 바로 혹평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기대만큼 웃기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영화가 별로였다고 말하기엔,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의 만듦새는 썩 나쁘지 않다. 오히려 중반 이후 포복절도 상황 코미디에 대한 강박을 살짝 걷어내고 나니, 조금 큰 틀에서 전복의 쾌감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막판 몸값 쟁탈전이 펼쳐지는 열차 신은 꽤 합이 잘 짜여져 있어서 한편의 잘만든 액션 스릴러를 보는 듯 했다.
TAG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김상진, 나문희, 대유괴, 리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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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양 2007/08/29 1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거이 잘돼야 나도 사는데.ㅋ

  2. 무.료.야.동 2008/09/21 04: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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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사회의 좀비, 연예인을 공격하다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08/26 00:56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지금 생각해보면 <타짜>는 대단한 영화였다. 이 한마디 대사로 학력 사회의 우스꽝스러운 단면을 이렇게 통찰적으로 조롱할 수 있다니 말이다. 하물며 하우스 마담조차 학벌을 들이댈 수밖에 없는, 이 처연한 현실을 최동훈은 '킥킥'거릴 웃음을 빙자해 뼈있게 담아낸 셈이다.

요즘 '학력 논란'이라는 새로운 마녀사냥이 한창이다. <디워> 파문을 계기로 멋지게 실체를 드러낸 사이버 홍위병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또 그들을 열심히 재활용하고 있는 찌라시 언론들의 맹동에 힘입어 여러 연예인 피 보고 있다. 대관절,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학력이란 게 뭐 그리 중요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상, 학력을 압도하는 게 유명세다. 그 유명세라는 권력을 손에 넣은 그들이 학력을 과장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다(최근 학력으로 덕 본 연예인은, 내가 알기로 서울대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잘 나가고 있는 CF 모델 김태희밖에 없다). 알고 봤더니 위조한 게 아니라 방조한 게 죄다. 무식하게 대충 프로필 짠 포털이 원흉이고, 당사자들은 유명세에 '학력 프리미엄'이 얹혀 잃을 게 없으니 대충 내버려 두었던 게 화근이다. 그러다 보니 표적으로 삼기에 제일 편리한 연예인들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게다.

언론은 예의 수염 쓰다듬으시며 공자왈 맹자왈 외치는 훈장 선생님 되셨다. 한쪽에서 잔뜩 학력 문제 들춰내면, 다른 한쪽에선 학력보다 중요한 게 실력이란다.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헛헛한 코웃음이 절로 난다. 초등학생때부터 외고 과고도 모자라 민사고 영재고 보내겠다며 학부모들이 눈에 불을 켜는 시대다. 학원들은 서울대도 한 물 갔고 아이비리그는 가줘야 명함 좀 내민다고 허파에 바람 잔뜩 불어 넣는다. 덕분에 학원들 배부르고 등 따시다.

그래서 중학교 들어가면 새벽 1시까지 학원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돈 좀 버는 부모는 외국 보낸다. 가짜로라도 학위 따오면 대충 비벼서 교수 자리 하나 주는 게 한국사회라는 이치를 왜 연예인들만 알고 있었겠는가. 빛좋은 개살구가 돼버린 대학들도 연예인들에게 학력을 팔아 먹으면 적당히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겠는가. 한국사회에서 도대체 학력이나 학벌 빼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실력을 운운하는 건 참담하게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서태지 같은 친구들이 우르르 성공할 수 있는 사회 구조냔 말이다. 예외로 상례를 가릴 수 없단 얘기다.

그러니 학력 위조 혐의를 얻고 있는 연예인들은 학벌 사회라는 좀비에게 딱 걸리고 만 셈이다. 우린 학벌 하나 얻겠다고 열나게 고생했는데, 넌 유명세라는 권력을 얻어 놓고 학력까지 사칭해? 구체적인 사연이야 어떻든 좀비들은 대충 이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이 더 끔찍한, 산 송장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그러니 정의를 참칭해 마녀를 화형시키고 있는 이 살풍경은 학력 사회의 카니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TAG 좀비, 학력, 학력 논란, 학벌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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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판타지 <즐거운 인생>

휘뚜루마뚜루 영화리뷰 2007/08/2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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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을 시사회에서 보고 웃다가 눈물 찔끔 흘렸다. 적당한 웃음과 적당한 감동. 피식 웃겼다가 짠하게 찌를 줄 아는 이준익은, 확실히 휴먼 판타지 장르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 말하면 그는 명절용 기획영화를 만들 줄 안다는 얘기다. 지난해 <라디오스타>에 이어 다시한번 '음악'을 매개로 대동소이한 웃음과 감동을 버무린 영화를 만들어도, 또한 그것이 남루한 현실과 음악이라는 해방의 공간을 오가는 전형성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명절 영화의 주요 전략이라는 사실을, 그는 영악하게 재활용하고 있다.

인물들은 예의 루저들이다. 직장에서 잘리고 대책 없이 떠도는 실업자 기영(정진영), 역시 해고 당해 대리운전과 택배로 생계를 잇고 있는 성욱(김윤석), 중고차 매매로 돈은 짭짤하게 벌지만, 기러기 아빠의 외로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혁수(김상호)가 이 시대 중년 가부장의 초라한 면모를 더욱 가련하게 보이게 하도록 뽑혀 나온 대표 선수들이다.

말 그대로다. 이들의 삶은 하나 같이 지리멸렬이다. 이 지지리 궁상들을 하나의 공통 분모로 묶는 것, 그것은 그들이 공유한 기억 속의 '활화산'이라는 밴드이며 음악에 대한 미련이다.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훨씬 더 초라했지만 열정만으로 똘똘 뭉쳐 촌스럽게 락커 흉내를 냈던 그 시절을 그들은 애써 소환하려 드는 것이다. 오로지 그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러나 걸림돌이 많다. 걸림돌은 그들이 여전히 가부장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이다. 음악을 향한 이들의 치기는, 그래서 영화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말 그대로 치기일 공산이 크다. 이 자들은 기타라도 퉁기고 드럼이라도 칠 수 있지. 다룰 수 있는 악기라고는 노래방 탬버린이 고작이고, 김추자와 산울림의 노래는 흥얼거릴지언정, 공연장 근처엔 얼씬도 못해본 생활 전선의 투사들에게 <즐거운 인생>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차라리 즐겁고 행복할 건더기가 있는, '가진 자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부터 불가능을 가능한 것처럼 꾸미는 매체가 아니던가. 현실의 남루함은 최대한 리얼하게(때로는 전형적으로 때로는 약간 과장을 섞어서), 그 극복의 과정은 최대한 드라마틱하게. 무기력한 현실을 상기시키는 인서트 컷을 몇 번 넘긴 뒤, 이준익은 음악이 가진 본질적인 기능, 즉 위안과 해소의 판타지가 인물들의 비루한 배경과 합쳐지며 감동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는, 검증된 솔루션의 위력에 여지 없이 편승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장르는 휴먼 드라마가 아니라, 휴먼 판타지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무대 인사에 나선 배우들은 하나 같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행복했다고. 좋겠다. 부럽다. 천성이 까칠한건지 난 왠지 이런 영화를 보면 행복하다기 보다 씁쓸하다. 뜬금 없는 얘기지만, 의약 분업 이전의 약국에선 신경안정제를 의사 처방전 없이도 마구 줬다. 그 약을 먹으면 피로감이 풀리고 긴장감이 해소돼, 특히 가난한 이들이 많이 먹었다. 그런데 이게 중독성이 있다. 내 어머니는 신경안정제 중독의 후유증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을 잃었다. 그래서 나는 신경안정제 같은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준다는 말을 잘 믿지 못한다.
TAG 리뷰, 시사 후기, 영화, 이준익, 즐거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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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진이 2007/09/12 0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 영화 우연히 시사회 티켓이 생겨 지난주에 보고 오늘에야 간단히 포스팅을 했는데, 쓰신 글도 지금에야 읽었습니다. 휴먼 '판타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하게 되네요. (저는 영화를 그저 즐겁게만 보았었지만.) 그 영화 속 상황이 실제 삶에 주어진다면 그야말로 상황은 '임진왜란'이잖아요. (어디서 봤던 표현이라,, 아무튼 그만큼 뒤죽박죽 고된 상황인 거잖아요)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 무섭네요. 신경안정제 얘기요. 저도 어느 순간 모르게 그것에 중독되어 그것만 먹으며 살고 있는 것 같아서.. 판타지라도 그저 즐거우니, 그냥 순간 순간 현실과 떨어진 채 그것들만 보며 '즐겁다 즐겁다' 하고 살아온 게 아닌가 하구요. (맨날 그런 것들만 혼자 쫓아다니며 살고 있어서^^;)

    어쨌든 판타지는 판타지인 거겠죠, 그걸 보며 즐거웠었다 해도. ^^;;

러시아 기행 7. 에필로그

디카 치카 2007/08/22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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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쩨르부르그 여행을 마쳤다. 밤 10시 20분 출발 열차를 타기 위해 모스크바 역에 도착했다. 역 이름이 왜 모스크바냐면, 이 양반들은 도착지 이름을 역명으로 쓴단다. 빼쩨르부르그에 올때 열차 테러로 21시간을 기차에 갇혀 왔는데, 여기에서 또 한번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테러 사건 여파로 모든 기차들이 5~6시간씩 늦게 출발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노숙자처럼 역 대합실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가 새벽 3시가 다 돼서야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나마 열차는 1시간 뒤에야 출발했다.

어렵사리 모스크바에 돌아온 우리는 하룻밤을 더 보낸 뒤 귀국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했다. 돌발상황은 여기서도 벌어졌다. 대형 트레일러가 교통사고를 내 공항 가는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다시피 한 것. 평소엔 1시간이면 달릴 거리를 무려 4시간이 넘도록 기어가고 있자니 자칫 비행기를 놓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열차에 도로까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 우리는 한숨 섞인 농담을 주고 받았다. "이건 필시 레닌의 저주일거야."

그런데 그 살인적인 체증의 와중에 진풍경을 목격했다. 어이없게도 1킬로미터에 한두대씩 고장 나 서 있는 차량들이 안그래도 막히는 도로를 더욱 막히게 하고 있었던 것. 대부분 연식이 20-30년은 족히 됐음직한 차들이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구닥다리 차들이 맛탱이가 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BMW고 폭스바겐이고 비싼 외제차들도 별무소용이다. 없는 자가 가진 자의 발목을 잡는 아이러니다. 양극화의 상징적인 풍경이랄까?  

도로에 갇힌 이들이 우리뿐만이 아니었으니 다행히 비행기는 이륙 시간을 1시간여 연기해 놓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겨우 수속을 마치고 출국 심사를 받는데, 굼뱅이 전산망이 또 한번 애간장을 태운다. 결국 우리는 비행기 문이 닫히기 직전 구사일생(?)으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아, 러시아! 이 신비롭고도 드라마틱하며 박진감 넘치고도 얼토당토 않은 나라여~. 별처럼 반짝거리는 그들 세상의 빛이 구름 아래로 가물가물해진다.

(연재 끝)
TAG 러시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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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기행 6. 사치의 끝장, 예카째리나 궁전

디카 치카 2007/08/22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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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본 여름 궁전 주변의 금칠갑 분수들은 서막에 불과하다. 뾰뜨르 1세의 딸이자 여제였던 예카째리나 2세가 18세기 중엽에 세운 이 여름 별장은 그야말로 '사치의 끝장'을 보여준다. 길이만 300미터가 넘는 저 건물 안에는 서로 다른 컨셉으로 꾸며진 55 개의 방이 있다. 모두 온갖 보석들로 치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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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 들어서자마자 계단 벽을 장식하고 있는 바로크 양식의 무늬와 골동품들이 궁전의 장난 아닌 위용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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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과 귀족들의 무도회가 열렸던 이 곳은 기둥이 온통 황금으로 치장돼 있다. 기둥 사이에는 대형 거울이 있어 연회장을 더욱 넓어 보이게 하는데, 춤을 추는 귀족들이 스스로를 비쳐보는 나르시즘의 도구로도 사용됐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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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안의 55개 방 가운데 밥 먹는 곳이다. 황금에 둘러싸여 먹으면 밥이 더 맛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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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후화>가 연상되는 복도다. 방방을 연결하는 이 황금 복도를 황제가 걸어가면 도미노처럼 문이 쫙쫙 열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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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이라 불리우는 보석으로 온 벽을 치장해 놓은 일명 '호박방'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6톤에 달하는 호박을 다 빼내갔는데, 종전 후 되찾으려 했으나 이미 호박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고. 결국 지난 2003년에 이르러 방이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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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과 보석도 너무 많다 보면 질리는 법인가. 파스텔 풍의 비교적 소박(?)한 장식이 오히려 신선해 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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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시다. 예카째리나 아줌마. 사치와 화려함의 끝장을 후손에게 남겨주신 여제. 천한 것들이 우르르 몰려와 입을 쩍 벌리며 그녀의 존귀한 별장에 너저분한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저승에서 한탄하고 있을까?
TAG 러시아, 예카째리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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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기행 5. 푸쉬킨 시의 여름궁전과 분수

디카 치카 2007/08/2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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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와서 푸쉬킨의 동상을 여러 개 봤다. 그런데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가 똑바로 서 있는 모습은 거의 없다는 것. 대부분 저렇게 삐딱하게 앉아 있거나 서 있다. 고뇌에 찬 젊음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 삐딱함을 러시아인들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예 빼제르부르그 인근의 도시 하나를 그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푸쉬킨 시는 그 이름에 걸맞는 문학과 예술의 향기를 압도하는 사치와 호화로움의 도시이기도 하다. 제정 러시아의 황실과 귀족은 이곳을 자신들의 쉼터로 만들었다. 호화로움의 극단을 보여주는 여름 궁전을 만들고, 온갖 종류의 분수를 만들었다. 이제부터 볼 사진들은 분수와 황금, 그리고 보석의 향연, 눈이 부시다 못해 아주 질리고 마는 이곳을 돌아보고 난 뒤 든 생각은 딱 하나다. "자식들, 지랄 맞게 사치스러웠군. 그러니 망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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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파스텔 풍의 여름 궁전은 멀리 서서 잡아도 카메라 프레임에 다 안들어올 정도로 옆으로 무진장 길다. 저기서 연일 황실과 귀족들의 사치 행각이 벌어졌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이란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지만 시대는 가끔 이렇게 그 보편성마저 배타적으로 독점한다. 혁명은 독점된 욕망을 탈환해 박제로 만든 뒤 시민에게 헌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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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궁전 뒤편으로 돌아 들어가면 아름다운 분수가 인공의 절경을 제공한다. 멀리 핀란드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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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의 이곳저곳은 황금칠을 한 신화의 주인공들이 장식하고 있다. 신화를 빌어 제정 러시아의 군국주의적 야망을 유감 없이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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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궁전 앞의 분수를 맞은 편에서 바라본 풍경이 기가 막히다. 가운데 서 있는 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 괴물의 입을 찢고 있다. 괴물이 누굴 상징하는지는 스웨덴을 제압하며 발트해를 차지한 제정 러시아의 역사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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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렇게 서정적인 분수도 물론 있다. 큐피트 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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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뜨르 1세의 동상으로 기억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그가 신은 장화 뒤축의 열려진 부분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나는 엉덩이만 두 번 맞추고 포기하고 돌아섰다. 차라리 서낭당에 빌고 말지~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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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곳곳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이색적인 분수다. 저 뒤켠은 바닥의 특정한 자갈을 밟으면 숲에서 물이 나온다고 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알고 봤더니 숲의 간이 건물에 숨은 누군가가 행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물 줄기를 뿌리는 것이었다. 관광객들을 골려주며 돈을 벌다니, 진짜 재미있는 직업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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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궁전 앞에서 바라본 핀란드 만의 모습이다. 수평선의 모습은 어딜가나 똑같다. 역사와 인간은 그 똑같은 풍경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저 바다의 지배권을 놓고 숱한 전투가 치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지배권을 얻은 짜르는, 흐믓한 표정으로 여름 궁전에 누워 저 바다를 바라봤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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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분수, 여름궁전, 푸쉬킨시, 핀란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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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기행 4. 빼쩨르부르그

디카 치카 2007/08/2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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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갔는데,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빼쩨르부르그를 보지 못한다면 단팔이 빠진 찐빵을 먹는 거나 다름 없다. 모스크바에서 밤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8시간. 우리는 침대칸을 예약했다. 낭만적인 침대 열차 여행은 그러나 약 6시간의 수면 후 악몽으로 급변했다. 앞서 달리던 열차가 노보그라드 인근에서 폭탄 테러로 보이는 탈선 사고를 당해 60여 명이 다치는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아연실색! 그 여파로 아침 8시로 예정된 열차 도착 시간은 오후 5시 40분으로 연장되더니, 다시 9시 반쯤에나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그렇다면 열차 안에서 장장 22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얘기. 우리를 안내한 선배는 마치 자신이 죄라도 지은듯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이럴 때 필요한 게 발상의 전환이다. "걱정 마세요. 우리 인생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이것도 여행의 재미죠." 여행객으로서의 낙천성을 한껏 발휘했더니 그제서야 선배의 긴장한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선배의 11살 난 딸은 아랑곳 않고 신나 한다. 나는 긴급 공수한 맥주를 두 캔 들이키고 또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케세라세라~ 잠만이 이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필살기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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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동행하지 못한 또 다른 선배(사진 왼쪽 선배의 남편)가 모스크바에서 뉴스를 통해 상황을 전해 듣고는 핸드폰을 걸어 왔다. 그의 지령, "최대한 신속하게 식당칸으로 이동해 식량과 음료를 확보하라!" 열차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영양 보충부터 해놓으라는 얘기에, 우리는 서둘러 식당칸에 가 사람은 넷인데 6인분의 음식을 시켜 놓고 꾸역 꾸역 먹었다. 배 두드리며 다시 침대칸으로 드는데, 옆 칸에 있던 중국인들이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역시 대륙적 천하태평이다). 러시아어나 중국어로는 안통하고,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아는 중국인이 한 명이 있어 상황을 전해줬다. 그랬더니 배가 고픈데 먹을 걸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고 묻는다. 호혜주의에 입각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선배가 그들과 식당칸까지 동행했는데, 이미 음식은 바닥이 난 상태. 두 시간 뒤 그들에게 겨우 빵 두개 씩이 배급됐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미리 음식을 챙겨둔 우리의 신속 정확한 행동에 새삼 뿌듯해진다. 과연 한민족의 생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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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사고 지역을 우회해 들어오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달려온 장장 21시간의 대장정이 마침내 끝난 시각은 저녁 8시 30분. 당초 이날 아침부터 시내 관광을 하겠다는 우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상 빼쩨르부르그의 살가운 저녁 풍경이 우리를 맞는다. 해군청 앞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이삭 성당이 야간 조명을 받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바티칸에 있는 성베드로 성당의 규모와 맞먹는 이 성당을 짓는데만 40여년이 걸렸고 투입된 인력은 무려 50만 명이 넘는다 하는데, 그 이유는 신성한 건물인만큼 기계의 힘을  빌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기둥 하나의 무게만 수십톤에 달한다고 하니, 저거 짓다가 꽤 많은 사람의 목숨이 날아갔을 것 같다. 도대체 종교나 신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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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쩨르부르그의 중심가도인 네브스키 도로에 위치한 카잔 성당 역시 웅장함에 있어서는 이삭 성당에 뒤지지 않는다. 19세기 초 농노 출신 건축가 바로니킨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물들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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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태트리스 게임의 배경으로 유명한 피의 사원이다. 19세기 초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주의자들인 나로드니키에게 암살 당한 자리에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세웠다고. 알렉산드르 2세는 농도 제도를 폐지하는 등 나름대로 개혁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급진 개혁 세력들에겐 그 역시 걸림돌로 보였나 보다. 그는 폭탄 테러에 마부가 다치자 그를 부축하기 위해 나섰다가 재차 던져진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제정 러시아의 짜르 가운데 그나마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서서히 끓어 오르는 혁명의 기운 앞에서 희생양이 된 셈이다. 그로부터 100년 후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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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러시아 황제 뾰뜨르 1세가 스웨덴을 제압하고 발트해의 해상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 빼쩨르부르그는 북유럽의 베니스라고 불릴 정도로 운하가 많은 도시다. 북으로 핀란드만을 바라보고 있는 항구 도시인만큼, 도시 곳곳이 크고 작은 운하들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다만, 건물이 바로 운하와 면해 있는 베니스와 달리 운하 주변에 도로가 있다는 것이 다른 점. 운하를 오가는 관광 유람선에 탄 채 피의 사원을 바라보니, 딱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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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쩨르부르그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자랑하는 유럽풍 건물들에는 여전히 옛 소련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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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 무거운 지붕을 이고 있누. 빼쩨르부르그에는 저런 식의 기둥 장식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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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를 오가는 유람선은 아주 낮은 다리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지난다. 마치 4차원 세계로 진입하는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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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뜨르 1세의 여름 궁전.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려는 제정 러시아의 야심에 걸맞게 그 규모가 엄청나다. 건물 앞의 드넓은 광장은 군인들의 연병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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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르의 군대가 도열해 있었을 바로 그 연병장에서 이제는 젊은이들이 롤러 블레이드를 탄 채 하키를 즐기고 있다. 강력한 전제군주제는 당대에는 민중의 고역이었을 것이다. 황실과 귀족의 권위를 떠받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피를 흘렸을까. 그런데 그 절대주의 체제의 위용이 크면 클수록 후대의 시민들에게 이렇게 꽤 즐길만한 위락 장소를 제공하게 되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그 역사의 아이러니, 다음 이야기에서 더욱 신물나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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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러시아, 상빼쩨르부르그, 여행, 운하, 유람선, 이삭 성당, 카잔 성당, 피의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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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기행 3. 아르바뜨 거리와 전승기념관

디카 치카 2007/08/2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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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끄레믈 관광을 마치고 모스크바의 인사동이라 할 수 있는 아르바뜨 거리에 갔다. 이곳저곳에 기념품 가게가 줄을 잇고, 악기를 들고 나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눈길을 모으는 곳. 모스크바의 활기찬 이면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거리 한켠에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동상이 서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고 노래했던 그다. 그러나 아내가 프랑스 출신 미남 장교와 바람이 나자 그와 결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어 38살의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그는 정말 삶이 자신을 속였을 때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않았을까? 아내와 나란히 서 있는 동상이, '왜 좀 잘 좀 살지'하는 후대인들의 마음을 대신 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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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뜨 거리를 걷다 보면 유독 멋진 그리피티로 가득찬 벽을 볼 수 있다. 요절한 한국계 록커 빅토르 최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팬들이 그려 놓은 것이다. 그날 저녁 선배가 그의 노래를 들려줬다. 그의 '음울한 유목민적 비트'가 체제의 무게에 짓눌린 구 소련의 청년들에게 어떤 해방감을 안겨줬을까? (멀리 러시아 땅까지 와서 화보 촬영에 여념이 없는 한국인 모델이 땡볕에 털 옷을 입고 진을 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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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러시아 유학 시절 공부했던 모스크바 국립대학 본관의 모습이다. 저렇게 하늘을 향해 로켓포처럼 솟아 있는 건물 양식을 일컬어 스탈린 양식이라고 한단다. 이런 스탈린 양식의 건물이 모스크바 시내 곳곳에 7개 정도가 된다. 스탈린은 무척이나 하늘을 찌르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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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깊게 찌르는 조형물은 여기에도 있다. 전승 기념관 입구에서 바라본 2차대전 전승 기념탑이다. 기념탑의 높이는 200미터는 족히 돼 보였는데, 전쟁 당시의 격전지 이름이 아래서부터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나치를 상대로 수 천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치른 2차 대전의 승리는 러시아인들에겐 특히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임에 틀림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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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기념관 내부에 들어서면 거대한 입상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용사들의 희생을 딛고 마침내 승리를 거머쥔 자의 포효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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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기념관 내부에는 대전 당시의 격렬했던 전투를 미니어처와 그림을 합성해 재연해 놓은 별실들이 이어진다. 이곳은 나치의 봉쇄로 수백일간 기아와 공포에 허덕였던 상빼쩨르부르그(당시 레닌그라드)의 상황이 마치 현장에 직접 가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정교하게 연출돼 있다(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는데 감시인의 눈을 피해 몰래 찍었다^^). 꽁꽁 얼어 붙은 네바 강에서 물을 얻기 위해 나온 시민이 다리 밑에 숨어 나치의 공습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있는 모습이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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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러시아, 모스크바, 빅토르 최, 아르바뜨, 여행, 전승기념관, 푸슈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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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기행 2. 붉은 광장과 끄레믈, 노보제비치

디카 치카 2007/08/20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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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모스크바 관광에 본격적으로 나설 차례다. 우선 러시아 권부의 상징 끄레믈(크렘린이라고도 하고 크레믈린이라고도 하는데, 둘다 영어식 표기라고 하니 여기선 러시아 발음을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이 당근 빠따 첫 코스다. 우선 이상한 것, 끄레믈 앞의 붉은 광장에 서니 하나도 붉지 않다. 그런데 왜 붉다고 할까? 눈을 들어 천천히 끄레믈을 살펴 보니 붉은 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차라리 붉은 벽 광장이라고 부르지. 왜 '붉은'이라는 말이 붙었는지 의문이 앞선다. 선배의 설명, "러시아 고어에서는 '붉다'라는 말은 '아름답다'는 뜻으로 쓰였어. 그래서 붉은 광장이라 부르는거지." 고개가 끄떡여진다. 이래서 당최 모르는 곳에 갔을 때는 가이드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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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물을 둘러싼 엄청나게 높은 붉은 성벽. 원래 지어질 당시에는 흰 회벽이었는데, 16세기 이반4세(이반뇌제라고도 부른다)가 붉은 벽돌의 바실리 성당을 건축할 무렵에 붉은 색 벽돌로 바꿨다. 이반 4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로도 유명한데, 바실리 성당의 건축가 2명이 영국으로부터 초청을 받자, 두 사람의 눈을 빼버렸다니, 참 끔찍한 인간이다. 그런데 러시아 역사에서는 이러한 끔찍한 군주가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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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에는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의 시신을 볼 수 있다. 방부처리돼 대중에게 전시되는데, 일찍 줄을 서지 않으면 오후 1시에 전시가 끝나버려 놓치기 일쑤다. 나 역시 첫날 레닌을 보러 나섰다가 실패하고 이튿날 2차 시도 끝에 겨우 그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뭐랄까, 누워 있는 밀랍 인형 같은 그의 모습을 보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세운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지금의 상황을 그는 저승에서 개탄하고 있을까.  박제가 될 운명의 현실사회주의의 참담함을 그는 사후의 시신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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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이후 공산당 권력을 상징해온만큼, 끄레물 주변에는 소련의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상징물들이 여기 저기에 산재해 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무명 용사들을 추모하는 이 불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불이 그들의 영혼이라 생각한걸까? 생긴 이래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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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 입구의 한 켠에는 볼셰비키 혁명과 소련의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혁명 지도자들의 이름이 비석 위에 적혀 있다. 소련 해체 이후 한창 자본주의화의 길을 달리고 있는 지금의 러시아 인들이 이 비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건국의 아버지들이여, 당신들은 실패했소!" 이런걸까? 아니면 "건국의 아버지들이여, 당신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당신들의 정신을 잊진 않겠소. 더 튼튼한 나라를 건설해 인민들이 평화롭게 잘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소." 이런 걸까. 순진하게도, 자칭타칭 좌파인 나는 자꾸 후자쪽으로 기운다. 섣부른 역사적 열패감이 아니라, 유토피아에 대한 염원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 그건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급속도로 보수화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절실하다는 것. 저 결과론적 실패자들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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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 안으로 들어오면 엄청나게 큰 대포와 대포알이 관광객을 반긴다. 대포도 그렇거니와 대포를 받치고 있는 수레의 문양이 예술적이다. 옛날 사람들에겐 전쟁도 예술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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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에 화재가 났는데, 서둘러 끄다가 청동 종의 일부가 깨졌다고 한다. 깨진 부분과 그 조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게 이채롭다. 앞의 대포도 그렇고 종까지, 확실히 나라가 커서 그런지 뭐든 큼직큼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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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믈 내부에 위치한 우스팬스키(성모승천 성당). 16세기 이반 3세가 이탈리아 건축가 피오 라반디를 초청해 짓게 만들었다. 피오 라반디가 러시아 기존 건축물들을 연구한 끝에 이후 러시아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버섯 모양 돔(꾸뽈)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앞서 바실리 성당 건축가들의 눈을 뺀 이야기를 했나? 이반 3세 역시 피오 라반디가 건축을 끝내자 아예 그를 죽여 버렸다고 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게 이들의 전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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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팬스키 내부의 벽은 온통 성인들의 그림이 그려진, 이른바 '이콘'들로 도배돼 있다. 이콘은 러시아 교회 미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느 성당에 가도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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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을 나서면 그 유명한 바실리 성당이 다음 코스로 관광객들을 맞는다. 러시아의 상징답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멋지게 서 있다. 왠지 이 성당은 눈이 잔뜩 쌓였을 때 보는 게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 놓고 두 눈을 잃은 건축가들의 억울한 마음이 짠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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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광장을 나서면 동양의 십이간지를 연상케 하는 동물들을 그려 놓은 이상한 바닥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모스크바의 중심점인 가운데 서서 소원을 빌며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나 뭐래나. 주변에 두 분의 할머니가 관광객들이 던지는 동전을 열심히 줍고 있었다. 할머니 왈, "이왕이면 큰 돈을 던지시우, 그래야 소원이 이루어진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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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을 둘러 본 뒤, 인근의 노보제비치 수도원을 방문했다. 이 수도원은 1524년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가 폴란드 령이었던 스몰렌스크를 탈환하고 그 기념으로 세웠다. 전쟁 중에는 요새로 사용했다고. 귀족들의 자녀나 여성들의 수도원으로 쓰여, 노보제비치라는 이름 역시 'New Woman'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뾰뜨르 대제가 자신과 권력 투쟁을 벌였던 누나 소피아와 첫째 부인 에브도키야를 유폐시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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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제비치 수도원 옆에는 유명 인사들의 거대한 무덤이 있다.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 위에 고인의 흉상을 배치한 형식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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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뒤를 이어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던 후르쉬초프의 무덤도 여기에 있다. 권불십년이라고 했던가. 그의 비석 앞에 놓인 꽃들이 말하는 것 같다. '화무십일홍'이라고.

끄레믈과 노보제비치 수도원 이야기를 하면서 한가지 빼 놓은 게 있다. 끄레믈에 있는 무기고와 다이아몬드 박물관(사진 촬영이 허가되지 않아 눈에만 담아 왔다). 혁명 이전 짜르 시대에 황실이 사용하던 각종 의상과 장식품, 식기와 무기, 보석류 들이 대규모로 전시돼 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엄청난 물량의 다이아몬드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 정도. 농노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사치의 끝장을 보았던 짜르 황실의 만행(?)은 나중에 생빼쩨르부르그의 여름 궁전과 예카째리나 궁전을 소개할 때 더 자세하게 말하고자 한다. 어쨌든, 볼셰비키 혁명이 괜히 일어났던 게 아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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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끄레믈, 노보제비치, 러시아, 레닌, 바실리 성당,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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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기행 1. 모스크바의 첫 인상

디카 치카 2007/08/1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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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강에 서 있는 피터 대제 동상

러시아에 가기로 마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대학 선배 부부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의 현지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에게 대충 비비면, 그 생경한 땅을 여행하는 게 한결 안락하고 윤택할 것이라는 계산. 노어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데다, 몇년째 세계 물가 1위를 유지하며 호텔 숙박비만도 하룻밤에 70-80만을 호가한다 하니 왠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그 땅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을 터다.

한편으로 지금은 푸틴의 리더십에 힘입어 초고속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는, '전(前)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8시간 반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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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부부가 살고 있는 모스크바의 아파트. 깔끔하고 아늑하다.


300만 원을 웃도는 월세(요건 평균 수준이라고 한다. 선배의 설명에 따르면 요즘 모크스바의 집값은 살인적인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마치 70년대 고속 성장기의 한국을 연상케 하는, 이른바 졸부 현상이 이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를 내고 살고 있는 선배의 집은, 중산층 동네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유럽형 인테리어가 아늑함을 안겨주는 공간이었다. 어쨌든 여기에 짐을 풀고 나니 여행이 예상대로 한결 술술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왠걸! 밤 10시가 넘었는데 해가 지지 않는다! 선배 말로는 이건 약과란다. 아예 해가 지지 않는 때도 있다니, 보드카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잠들지 못하는 밤같지 않은 밤의 연속이 고역이라고. 그의 증언에 화들짝 놀란 나는, 해가 떠 있는 괴상한 심야에 냉동실에 넣어도 얼지 않는, 도수 40도 짜리 보드카 몇 잔을 연거푸 들이 붓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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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름도 따갑다. 그러나 습도가 낮아 한국처럼 후텁지근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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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시민들. 많이 쪼여 놓아야 겨울을 날 수 있어서 그런가? 이들의 햇볕 사랑은 유난하다.

러시아의 여름은 그리 덥지 않다는 말은, 올해만큼은 거짓말이 됐다. 러시아에 온 다음날부터 섭씨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등을 따갑게 한다. 게다가 뭔 놈의 해는 그리 일찍 뜨고 그다지도 늦게 지는지. 하루 종일 내려 쪼이는 뙤약볕에 짜증이 날만도 한데, 러시아 사람들, 오히려 그 해를 즐긴다. 웃통을 훌러덩 벗어 재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공원이나 해변 뿐 아니라 거리 곳곳에서 목격된다. 겨울에는 길게는 한 달 이상 해를 보지 못하는 나라이다 보니, 한 철의 해가 소중하고 고마운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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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있는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조경의 수준이 놀랍다.

그것도 그렇지만 동네 어귀마다 어김 없이 들어서 있는 수십만 평 부지의 공원들을 거닐다 보면 그 규모와 아기자기한 조경 솜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아직까진 일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여기에 서보면 러시아야 말로 웰빙 선진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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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선 짜증나게 더운, 그들로서는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씨에 거리 곳곳에서는 방금 결혼식을 마친 신랑신부들이 기념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별도의 예식장이 없는 러시아에선, 결혼 신고소에서 간단하게 식을 올린 뒤, 들러리들을 데리고 여기 저기 다니며 사진을 찍는단다. 그리곤 밤늦도록 에헤라 디여~. 웨딩 사진을 미리 찍는 우리의 풍속과 비교되면서, 간소하지만 제대로 노는 결혼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선남 선녀들의 모습이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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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믈 건너편 건물 옥상에 세워진 삼성의 대평 간판이 눈길을 모은다.

모스크바 거리에는 제정 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이끈 전제 군주 표트르 1세(피터 대제)의 늠름한 동상과 짜르 체제를 전복시키고 볼셰비키 혁명을 이끈 레닌의 동상이 공존한다. 푸시킨과 차이코프스키의 예술적 향기와 에이브릴 라빈을 앞세운 아메리칸 팝의 현란한 공세가 교차한다. LG와 삼성 등 국내 대기업의 대형 간판 역시 눈길을 잡아 끈다. 시내 중심지에는 롯데 백화점이 우뚝 솟은 채 개장을 기다리고 있다. 고급 외제차가 즐비한 도로에는 벌써 폐차장으로 갔어야 할 차들도 쌩쌩 달린다. 소련 시절에 세워진 잿빛 건물 틈 사이로 고급 맨션이 새로운 마천루를 만들고 있다. 옛것과 새로운 것, 보존과 극복의 에너지가 마구 뒤섞인 이곳은 몇마디 묘사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공기를 풍긴다. 모스크바에서의 이틀째 밤, 해는 끈질기게 하늘 한 자락에 붙어 있다. 우리는 또다시 냉동실에서 잔뜩 '히야시'된 보드카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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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러시아, 모스크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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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경정 2007/08/22 1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 기자니임~ 언제 이 많은 글과 사진들을 올리셨는지. 일하기 싫음과 '아이템 찾기'를 핑계로 지인들의 블로그를 파도 타다가, 여기서 한참 머물다 갑니다- 금욜 저녁에 뵙지요! 내일쯤 전화드릴게요~ 아직 장소를 고심중이랍니다.

씁쓸하지만 음미할만한 스펙터클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08/18 15:09

<화려한 휴가>와 <디워>를 둘러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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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사회적인 논쟁으로 확산되는 경우를 우리는 적지 않게 봐 왔다. 1천만 명 안팎의 대규모 관객 동원에 성공한, 이른바 대박 영화의 경우가 대개 그랬다. 그래서 충무로에는 5백만 명까지는 영화의 힘에 의한 것이지만, 그 이상의 흥행 스코어는 사회적 분위기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속설이 통용될 정도다. 영화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파장은 처음에는 영화 자체가 가진 미덕과 가치에서 출발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그런 정도의 단계를 훌쩍 뛰어 넘어 버린다. 사실 나처럼 영화와 관련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조차 여기서부터는 별로 말할 일이 없어진다. 논쟁의 주도권이 어느 단계부터 시민 사회로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가 신문 문화면의 주연에서 순식간에 사회면의 조연으로 바뀌는 셈이다. 때론 정치면으로 갈 때도 있다.

골육상쟁의 아픔을 블록버스터급 비주얼로 재확인한 <태극기 휘날리며>나, 국가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에 의해 개인의 존엄이 깡그리 무시됐던 시대의 공공연한 비밀을 신파적이고도 자극적으로 들춰낸 <실미도>, 그리고 약자를 코너로 코너로 몰아붙이는 우리 사회의 온갖 추잡한 모순을 한강 괴수로 형상화한 <괴물>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신드롬의 주인공이 됐던 시대극 <왕의 남자> 역시, 정치 권력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불신을 어느 정도 활용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영화들이 갖는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처를 대중 영화의 화법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들 작품들의 흥행 노림수는 결국 그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데 있다. 상처가 완전히 치유됐다면, 그리고 영화가 소환한 역사적 사실이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을 어떤 것이 됐다면, 1천만 명 이상의 관객이 자발적으로 자기 돈을 내고 관람권을 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과 아픔을 드러내는 방식이 관습적인 오락 영화의 틀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공통 분모다. 극장까지 가서 딱딱한 역사 수업을 기대할 리 없는 대중 관객은, 스크린에 영사된 비극적인 상황이 '오락적 스펙터클'의 범주 안에 있을 때 '영화적 체험'을 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평단 일각에서 이들 영화들이 역사를 소환하되, 결국 휘발시킨다고 비판하는 것도 바로  대중영화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자조의 발로일 것이다.

지금 한창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화려한 휴가> 역시 이런 쟁점의 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영화였다.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당시,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꽃잎>이나 <박하사탕> 등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앞선 영화들과 비교하며, 블록버스터의 외피를 두르고 광주에 대한 죄책감을 소비하거나, 혹은 결국 이렇게 정리하고 청산 또는 망각하자는 게 아니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실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히 광주를 대중 상업 영화로 불러 내다니! 이 영화의 탄생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 댄 (나를 포함한) 많은 영화 글쟁이들의 모습은, 결국 광주에 대한 거대한 죄책감의 방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쟁이 크게 쓸모가 있었던 건 아니다. 관객들은 평론가들의 과민한 우려와 달리,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지는 것 이면의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광주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려 온 많은 이들이 에두른 망각이 아닌 정면으로 응시하는 기억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해 낸 영화의 힘을 칭송했다. 나 역시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난 뒤 흥분에 젖어 이 영화가 역사를 소환하되 휘발시킨 혐의를 얻고 있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론을 채택하긴 했지만, 그 의미는 남다르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80년대 이후 민주화의 거대한 기폭제가 됐던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이 도도하게 현재진행형일 뿐 아니라, 그 치유되지 않은 거대한 상처를 이렇게라도 보여주는 것, 오락적 스펙터클의 범주로라도 대중에게 역사적 추체험의 기회를 안겨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일은 결코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지지해야겠다고 믿으면서 내가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빠뜨렸다는 것을 요즘 뒤늦게 깨달았다. 광주 정신이 현재진행형이니만큼 여전히 광주 정신을 훼손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야겠다고 굳게 믿고 획책하는 세력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말이다.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맙게도 ‘전두환 전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전사모)’ 회원들이 그걸 퍼뜩 깨닫게 해줬다.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최근 이송희일 감독이 <디워>의 전투적인 광팬들을 향해 조소했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한여름 밤의 공포’였는데, <화려한 휴가> 안보기 캠페인을 펼치는 그들이 들이대는 비논리와 몰역사적 주장들은 그 자체로 한여름 밤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을 두고 ‘기억하려는 자와 그 기억을 방해하려는 자들간의 싸움’이라고 부른다면 어울리지 않게 격조 있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건 그냥 한 편의 썰렁한 말장난 개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대로 영화가 주는 사회적 파장이나 반향은, 그것이 크든 작든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과 관련해 시민 사회의 인식 또는 무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런 관점에 본다면, <화려한 휴가>를 둘러싼 일련의 해괴한 논쟁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이 사회에 여전히 역사적 기억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려는 후진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과, 스스로가 속해 있는 시민 사회를 영화 한편에 휘둘리는 우민 공동체로 천대하는, 일종의 자발적 노예화의 속성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의 주동자는 전두환이 아닌 김대중’이라느니, 당대 광주 시민들을 ‘총을 든 폭도들’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데다, 영화가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해석들을 보면서, 역사적 기억이라는 게 입장에 따라 이렇게까지 징그럽게 굴절되고 왜곡될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전히 그 분을 ‘각하’로 모시는 그들이 그 각하의 명예 회복을 위해 지금의 굴욕을 인내하자는 처연한 다짐에서 폭력에 길들여진 마조히즘적 배타성의 극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것도 인터넷에서의 자발적 동조자들이 1만 5천 명에 달한다는 것을 뼈아프게 각성하는 것은, <화려한 휴가>가 소환한 비극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역설적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화려한 휴가>를 보지 말자고 부르짖는 그들이 차라리 <디 워>를 보라고 강권하고 있는 상황은, 내게 <디 워>의 일부 열성팬들이 보여주고 있는 과격한 배타성과 묘하게 중첩돼 보인다. 그것은 분명 다른 차원이지만, <디 워>를 핍박 받은 고독한 영웅의 드라마틱한 기사회생과 동일시하며, 그 비판론자들을 싸잡아 적대시하고, 홍위병적 모독과 파시즘적 테러를 서슴지 않는 태도(이송희일 감독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 영화와 열성팬들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성정체성까지 들먹이는 조리돌림을 당했다)와 ‘전사모’의 태도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현상적으로 통용되는 명분은 애국심이다. <화려한 휴가>에서는 애국가가 올려 퍼지는 시점에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된다. ‘전사모’의 홈페이지에도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영화 <디 워>를 보는 게 애국이라는 주장이 난무한다. 그러나 그 애국은 다른 관점을 가진 자들을 서슴지 않고 패대기 치는 애국이다. 과거에 대한 뼈아픈 반성은커녕 틈만 나면 전범들의 위패를 찾아 신사 참배하는 일본 총리의 애국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애국이다. 남의 나라 국민이야 살든 죽든, 테러 세력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태평한 원칙만 되뇌는 부시의 애국과 대동소이한 애국이다. 그들만의 애국에는, 제대로 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성찰이 빠져 있다. 동시대의 시민과 그들이 함께 일궈온 소중한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이 빠져 있다. 애초에 성찰에 닿을 수 없으니 왜곡된 기억을 ‘역사적 사실’이라 우겨 대는 일에서 하등의 부끄럼을 느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여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단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이 사회가 얼마나 담론 형성과 의사소통에 미숙한지, 여전히 적지 않은 이들이 역사적 정의에 대한 불감증과 왜곡된 애국주의에 함몰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살풍경을 목격하고 있다. 재론하거니와 어떤 영화보다 더 강력한 그 스펙터클은 씁쓸하지만 음미할 가치가 있다. 쓰디 쓴, 그러나 정신이 번쩍 나는 각성제다.

* 8월 14일자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