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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에 해당되는 글 65건

  1. 2007/12/13 블로그를 이사했습니다.
  2. 2007/12/08 블로그를 한다는 것 (1)
  3. 2007/12/06 영화가 영화로 대접 받기 위하여
  4. 2007/12/06 알코올 의존증에 대하여 (2)
  5. 2007/12/03 프리랜스로 산다는 것 (4)
  6. 2007/12/02 영화상 시상식, 차라리 영진위가 하라!
  7. 2007/12/02 도쿄 타워
  8. 2007/11/30 반전 스릴러를 닮은 2007 대선
  9. 2007/11/28 닯고 싶지 않은 '아저씨 증후군' 톱10
  10. 2007/11/26 새벽 (학원가)의 황당한 저주
  11. 2007/11/17 로맨스 영화 속 사랑의 발효
  12. 2007/11/17 양조위와 그를 추억함
  13. 2007/11/13 제이슨 본이 보지 못한 모스크바
  14. 2007/11/09 세상엔 영화 말고도 분노할 게 많다 (2)
  15. 2007/11/08 로맨스 영화의 '삐리리' 법칙
  16. 2007/11/05 내 마음 속의 왕가위를 추억하며
  17. 2007/10/31 전두환 씨에게 감사하는 딱 한가지 (2)
  18. 2007/10/29 M, 저주 받을 영화인가
  19. 2007/10/22 정동영이 아닌 신정환을 닮고 싶다 (4)
  20. 2007/10/11 [PIFF 폐막에 부쳐] 욱일승천의 대가는 무기력? (2)

블로그를 이사했습니다.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2/13 23:49
며칠동안 이 블로그가 차단돼 있었습니다. 아마도 관련 서버에 이상이 생긴 것 때문인 듯 합니다. 사실 이 블로그의 호스팅을 제 전 직장인 FILM2.0이 해주고 있었습니다. 회사도 관뒀는데 계속 전세 살고 있었던 셈이죠.^^

어쨌든 언젠가 이사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장기 접속 불가 사태(?)를 계기로 블로그를 티스토리로 이사했습니다.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 블로그를 구독하고 계시거나 즐겨찾기 해두신 분들께 수고로움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만 새 주소로도 자주 왕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cinemagor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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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한다는 것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2/08 15:40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FILM2.0 온라인 편집장 시절, 회사는 몇 명의 간부 사원들에게 각자의 블로그 오픈을 지시했다. 경쟁 매체들이 블로그를 통한 커뮤니티 활성화에 앞다퉈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도 회사 이름만 미디어2.0이지 기실 2.0적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더디게 반응해 왔던 회사로서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감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블로그란 게 네티즌들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해소해주기 위한, IT 자본의 상업적 전술의 일환이라고 믿었기에, 나조차 블로거로 나선다는 게 영 못마땅했다. 지난해 말 'behind boxoffice'라는 제목의 블로그를 오픈시켜 놓고,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쓸까 고민했다.  FILM2.0이라는 영화 전문 매체와는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나 어떤 것이 블로그적 글쓰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 않을 때는 미처 몰랐던 블로그의 매력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블로그 공간이 방문자들과의 더욱 친밀하고도 유연한 소통과 토론의 장으로써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순간부터였다. 방문자들의 애정어린 댓글과 관심어린 제언들은 내게 자연스레 블로그적 글쓰기의 방향성을 일깨웠다. 어렴풋하게나마, 나는 블로그가 팩트와 정보보다는 이슈와 관점의 매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므로 블로그 글쓰기는 세상의 제반 현상을 나의 세계관으로 걸러낸 지극히 주관적인, 그러나 타당성 있는 관점을 밀어 붙일 수 있어야 한다. 독특하고도 개성 넘치는, 그러나 설득력 있는 관점들이 하나의 거대한 강물을 형성했을 때, 비로소 객관적인 아젠다가 만들어진다. 모래알이 언덕을 만드는 것과도 같은 블로그 저널리즘의 형성 과정인 것이다.

김경찬 피디, 그리고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씨와 의기투합해 팀 블로그 3M흥업을 오픈하고, 다음 블로거 뉴스에 참여하면서 블로그가 기존 매체를 압도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팀블로그를 오픈한 지 6개월이 조금 지난 지금, 누적 방문자수 400만 명을 눈앞에 두게 됐다. 세상에! 일개 블로그에 우리나라 인구 10명 중 1명이 방문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소수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능가하는 대중 흡입력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다.

허나 여전히 장벽은 남아 있다. 블로그를 아마추어리즘의 범주 안에 묶어 놓고 개별 블로그의 브랜드화를 애써 폄훼하려는 시각들 말이다. 여전히 메타 블로그나 포털 편집자들의 간택에 의존해야만 트래픽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불안정성도 한계라면 한계다. 네이버가 전략적으로 오픈한 블로그 '이동진 닷컴'처럼 안정적인 트래픽을 보장 받으며 미디어적 영향력을 확보해낼 수 있느냐가, 3M흥업에게 주어진 다음 과제라 하겠다.
 
내가 만약 블로그에 인터뷰 글을 쓰겠다며 유명 영화 감독이나 배우를 섭외하면 영화 마케터들은 콧방구도 안 뀔 게 분명하다. 네이버의 든든한 재정적, 트래픽 백업을 받고 있는 '이동진 닷컴'이라면 또 모를까. 이동진 선배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3M흥업도 그에 못지 않은 차별적 퀄리티를 지녔다고 감히 자부하고 싶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품성을 인정 받아 낙점되는 길이 아닌 개척의 길을 택한(나는 이 개척의 과정이 진짜 블로그적인 성장 모델이라고 믿는다) 우리로선 더 다양하고 풍부한 컨텐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할 때 슬쩍 답답증이 몰려 온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우리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싶다. 겉모습만 블로그이지 알맹이는 기존 미디어의 방식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블로그 특유의 접근 방식으로 기존 매체의 지리멸렬함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대안적 미디어의 길을 끊임 없이 모색할 작정이다. 잘 될른지 모르겠으나 블로거로 참여한 지 1년이 되어 가는 지금, 희미하게나마 그 희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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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날라리아 2007/12/09 0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극복하시리라 믿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영화가 영화로 대접 받기 위하여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2/06 22:17
 
2007년 영화계를 돌아보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몇 군데서 섭외 전화가 걸려 온다. 2007년 영화계를 결산해 달라는 방송 프로그램들의 인터뷰 요청들이다. 매년 되풀이 되는 얘기들이지만 올해만큼은 부쩍 ‘부진’이니 ‘위기’니 하는 단어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충무로의 체감 경기를 언론이 실감할 만큼, 현상적인 지표들이 심각해 졌다는 반증이다. 예전엔 그냥 좀 들었다고 말할 수준인 200만 명 돌파 영화가 가물에 콩 나듯 나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실감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위기의 원인 분석에 대해선 여전히 수박 겉 핥기에 머물고 있어 답답하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했는데, 이런 질문이 날아 왔다. “한국영화들이 요즘 시장에서 잘 안 통한다는 것은, 관객들이 그만큼 똑똑해졌다는 의미이겠죠?” 나는 약간 심사가 뒤틀린 끝에 이렇게 내뱉었다. “그거 설명하려면 굉장히 긴데요. 일단 현상적으로는 이래요. 관객들이 똑똑해진 게 아니라 영화가 멍청해진 거라고 보는 게 맞아요. 영화가 멍청해지니 관객들도 따라서 멍청해지고, 또 그 멍청한 수준에 맞추다 보니 영화가 더 멍청해지는 일종의 악순환이 되고 있는 것이죠.” 그랬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의 피디는 “방송에 쓰긴 좀 거친 표현”이라며 “점잖은 어투로 다시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한다. 나도 점잖게 말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 충무로의 상황이 ‘에헴’ 하고 있기에 하도 답답해서 그랬다.

창의력 부족? 그걸 누가 모르나!

한국영화 위기론이 고개를 들 때마다 ‘관객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충무로의 창의력 부족’이라는 분석은 전가의 보도처럼 쓰여 왔다. 충무로가 예전만큼 똘똘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충무로가 언제 그렇게 똑똑했었나? 그런 결론은, 너무 편리하다.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추론이다. 명색이 언론이라면 이면의 구조를 살펴야 하는데, 한국의 주류 언론은 구조와 맥락을 살피는 데는 그다지 부지런하지 않다. 들여다 보면 골치 아프고, 독자와 시청자 역시 골치 아플 게 뻔하니, 관객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맞출 참신하고 새로운 영화가 절실하다고 짐짓 정색하고 끝내면 세련되고 깔끔해 보이는 줄 안다. 그런데 그걸 누가 모르나?

사실상, 지금 한국 영화 산업의 불황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극장 수익에만 편중된 왜곡된 수익구조와 스크린 독과점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데서 야기됐다고 믿는다. 주지하다시피, 부가 판권 시장은 사실상 고사 직전이다. 이제 와서 대책 마련에 분주하지만 외양간을 고치기에 너무 오래 전에 소를 잃어 버렸다. 해외 시장도 1~2년전까지 한류 현상에 힘입어 반짝했을 뿐 기대만큼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수 시장, 그것도 극장 뿐이다. 좁은 방안에 쥐를 가둬 놓듯, 얼마 안 되는 스크린을 놓고 한 주에도 십 수 편의 영화들이 경쟁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독과점 상황이 벌어졌다. 스크린 싹쓸이를 통해서라도 단숨에 많은 관객을 동원하려는 대형 배급사들과 극장들의 이해 관계가 일치했고, 그러다 보니 흥행 양극화 현상이 벌어졌다. 극소수의 ‘되는 영화’와 대부분의 ‘망하는 영화’로 양분된 것이다. 영화 시장 역시 2대 8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험악한 정글이 됐고, 2006년과 2007년을 거치며 그 정글 법칙은 더욱 고착화됐다.

양극화 환경은 개별 영화의 실패 확률을 그만큼 높이게 된다. 위험도가 올라가니 무리수를 둔 마케팅이 횡행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영화의 컨셉트와 필수적인 정보마저 가려 버리고, ‘일단 동원하고 보자’ 식의 막가파식 홍보는 ‘낚시 마케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설령 관객들의 배신감을 야기할지라도 치고 빠졌으면 그만이라는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다. 관객들은 ‘낚였다’고 한탄하고, 인터넷 영화 평점은 마케팅 방법론에 대한 성토장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적지 않은 관객들은 돈 아끼고 시간 아끼기 위해 왠만하면 불법 다운로드라는 안전 장치를 활용하자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이통사 할인도 대폭 축소됐는데 일부러 극장까지 갈 수고를 감수할 만한 화끈한 영화가 별로 자주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니 부가 판권 시장은 물론, 최후의 안전지대였던 극장마저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투자 배급사와 제작사들은 물론, 최근엔 극장들마저 가파른 수익률 저하로 울상을 짓고 있는 상황은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해 영화 시장의 악순환 시스템을 두고 본 대가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양극화 환경, '죽이는 컨셉트' 발명에 사활을 걸고

이런 구조에서 기획 영화나 대중 상업영화들이 취할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어떻게 해서든 관객들의 호기심을 일거에 가로챌 ‘죽이는’ 컨셉트를 발명하는 일에 사활을 걸게 된다. 설득력 있는 스토리나 영화적 완성도는 차후의 문제가 된다. 2년 넘게 시나리오 개발하는 시간이면 차라리 팔릴만한 이야기를 싼 값에 수입하는 게 낫다는 계산에 따라 리메이크작들이 범람한다. 너도 나도 요즘 잘 나간다는 일본 원작들을 사들이기 바쁘다. 그나마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승부를 거는 영화들은 이르면 투자 단계에서, 늦으면 배급 단계에서 ‘흥행성 없음’이라는 주홍글씨를 받고 나자빠진다. 도대체 창의력을 발휘할 멍석이 깔리질 않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충무로에 ‘창의력을 좀 발휘해봐’라고 질타하는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적 발상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지난 2006년 여름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한창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을 때, 극장들이야 그렇다 쳐도 영화진흥위원회와 일부 제작자들, 배급사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시장 논리’를 근거로 독과점 규제론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시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 스크린 쿼터 제도도 벌써 폐기 처분했어야 옳았지만, 신기하게도 거기서만큼은 ‘영화는 상품이기 전에 문화’라는 논리를 들이댔다.  ‘시장 논리’라는 게 코게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스스로도 그 논리적 모순을 모르지 않았던 영화 시장의 기득권자들은 스크린 독과점이 시장 논리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문제가 없지 않으므로 영화계 주체들의 ‘자율적 조절 기능’에 맡기는 게 좋다고 슬쩍 비껴 갔다. 이런 논리는 결국 이 문제를 좀더 강력한 제도적 장치로 개선해보겠다는 강경론자들의 입을 막기 위함이었고, 결과적으로 자율 조절론은 힘을 얻었다.

연초 차승재 제작가 협회장은 제작자들 스스로 과도한 스크린을 잡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율 조절론의 실천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니 필연적으로 그 약속이 지켜질 리 없었다. 지난 여름 <디 워>가 600개 이상의 스크린을 싹쓸이 했고, <화려한 휴가> 역시 한 주 앞서 500개 이상의 스크린을 독식했다. 한국영화의 부진 앞에 일단 스크린 독과점 논쟁을 접어둔 언론들은 한국영화의 부활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영화가 국가주의나 애국주의와 만나는 순간에는 그 어떤 문제 제기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사이, 스크린 독과점과 영화 시장의 자본 악순환 구조를 타개할 정책적, 제도적 장치에 대한 논의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영화평과 상품후기가 다르지 않은 시대,
영화가 다시 문화가 되기 위해선

이제, 시장 논리와 영화인들의 자율적 조정력이 야기한 2007년의 영화 시장을 돌아 보자. 제작자든 투자자든 참혹한 상처를 입으며 패퇴하고 있다. 허리 끈을 더 바짝 졸라 맬테니 제발 투자해달라는 제작자들의 읍소가 처연하게 들릴 정도다. 심지어 투자-제작의 고전에도 불구하고 홀로 승승장구해오던 상영업마저 장사가 안 된다며 아우성이고 관객들은 볼 영화가 없다고 지청구다.

폐허와도 같았던 2007년을 보내는 즈음에, 영화 시장의 주체들은 한가지 중요한 명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서비스 상품이기 전에 관객들의 정서를 파고 드는 예술이며 동시대의 시민들이 그 정서를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한 매체이다. 그것이 연간 매출액 1조 원에도 못 미치는 이 작은 시장에 그 많은 언론들이 관심을 쏟고 정부조차 따로 진흥 기관을 두는 이유이다. 그것이 노골적인 광고 목적에도 불구하고, 배우나 감독들이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영화 홍보를 늘어놓더라도 눈감아주는 이유이다. 유리할 때만 그런 암묵적인 합의를 십분 활용하면서도, 정작 돈을 버는 순간에는 ‘영화는 상품이며 고로 시장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순이며, 고로 자가 당착의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이제 관객들조차 더 이상 영화를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돈 냈으니 낸 돈만큼 보여달라고, 그러지 않으면 평점 권력을 동원해 처절한 복수와 응징을 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는 시대다. 영화평과 화장품 사용 후기가 다르지 않은 시대다. 영화를 복권시키는 길은, 영화가 영화로서 대접받는 ‘구조’를 세우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영화인들 스스로 영화의 정체를 다시 아로새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12월 6일자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에 기고한 글입니다.

TAG 2007년 영화계 결산, 디 워, 스크린 독과점, 영화 산업, 창의력, 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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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의존증에 대하여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2/06 01:18
오늘도 실패했다. 참자, 하면서 밤 10시만 넘으면 으레 도진다. 혈중알콜농도의 결핍이 의지력 부족한 나를 동네 마트로 유인했고, 마침 할인행사 중인 2004년산 제이콥스 크릭 와인을 발견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사들고 들어와 넉 잔을 연거푸 마셨다.
 
술이 내 일상의 동반자가 된 지는 꽤 오래 됐다. 어느 순간부터 술을 마셔야 잠이 들고 술이 들어가야 글이 써졌다. 참 희한하게도 3M흥업에 쓴 글 가운데 수 만 명의 히트수를 기록한 글들은 모두 알딸딸한 알코올의 힘을 빌어 쓴 글들이니...그 얄궂은 우연의 일치가 안 그래도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을 더욱 부추긴다.

사실 나는 술이 약했다. 술을 처음 입에 댄 게 고 3때. 같은 반의 친구가 차에 치여 숨진 날이었다. 속상해 동네 친구 녀석들과 포장마차를 찾았고, 치기 어리게 소주 석 잔을 들이키고는 그냥 뻗어 버렸다. 이틀이나 이어진 두통과 숙취를 겪은 뒤에야 나는 술이란 게 먹을 게 못되는 못된 식품이란 걸 깨닫고 다신 마시지 않겠노라 쓸데 없는 다짐을 했다.

대학에 들어가니 신입생 환영회부터 냉면 사발에 막걸리를 가득 붓고는 한번에 마시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폭력적인 의식을 치러야 했다. 마시는건지 들이 붓는건지 모른 채, 흘리면 흘리는 것까지 따로 받아 끝까지 마시게 하는 사디즘적 선배들의 강압에 못이겨 위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 되도록 마셨다. 그리곤 화장실로 뛰어가 오바이트의 추진력에 몸이 휘청댈만큼 개워 냈다. 이 신성한 오바이트야말로 가식적인 제도 교육의 찌꺼기를 개워내는 의식이라는 선배의 흰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오로지 속이 쓰릴 뿐이었다.

그럭저럭 소주 석잔을 치사량으로 여기고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에 들어가니 듣도 보도 못한 폭탄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잔 마시고 개우고, 또 한잔 마시고 개운다. 이 무슨 지랄인가 싶었는데, 미개했던 그 시절엔 그래야 살아 남을 것 같아 마시고 개우고 마시고 개웠다.

시나브로 술이 늘었다. 강압이 내성을 키워준 것도 모자라 이제 내가 스스로 술을 찾게 됐다. 후배들을 이끌고 낯술을 마셨다. 후배들은 이상한 선배군, 하며 혀를 끌끌 찼지만, 나는 술 한잔 안하면 오후 일을 못할 지경이 됐다.

지난 봄에 건강 진단을 받았다. 내심 기도했다. 제발 알콜성 지방간 판정이 나와야 할텐데. 그리하여 의사 선생으로부터 당신 술 작작 마시라는 질타를 받기를. 허나 건강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처참하게 나를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손에 위탁했다. "얘 아직 멀었네, 좀더 멕여."

지난 가을, 알코올 의존증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입증시키기 위해 나는 닷새동안의 연속 금주에 도전했다. 사흘 성공, 나흘째 실패. 그리곤 에라 모르겠다. 디오니소스여, 나를 알아서 하시라...이렇게 된거다.

술의 힘은 위대하다. 그 위대함을 거역하기에 인간의 힘은 너무 미약하다. 오늘도 나는 술에 굴복한다. 그리곤 '어 저기 달이 떠 있네' 하며 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죽어 버린 이백의 심정이 된다. 아마도 이 침울하기 그지 없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나는 주당을 넘어 주성, 혹은 주신의 반열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짝 억울하다. 내가 술을 좋아하게 된 과정 말이다. 그 미개한 선배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녹차와 얼그레이만 마시며 독야청청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헌데 그렇게 생각해 보니, 그런 나는 참 재미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한 잔 더 따른다.
TAG 술, 알코올 의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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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록샘 2007/12/07 2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래도 내심 건강이 걱정이 되네요. 좋아하는 술 적당히 즐기시면서

    운동도 하시면서 건강 꼭~ 챙기시길 바랍니다.

    기자님의 글도 좋아하고 기자님의 목소리에서는 왠지모
    를 신뢰감이 느껴져서 좋아요~~

    • cinemAgora 2007/12/08 1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궁, 감사합니다. 나름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제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이죠.ㅎㅎㅎ

프리랜스로 산다는 것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2/03 00:00
팀 블로그 '3M흥업'을 시작한 뒤 이곳 제 개인 블로그에는 방문자수나 댓글이 이전보다 많이 줄었습니다. 솔직히 약간 섭섭하기도 했습니다만, 실은 팀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이곳에도 그대로 올리고 있었으니, cinemAgora.com에 대한 차별화 노력이 부족했던 제 탓이 크겠지요.

저는 블로그에 시시콜콜 개인사적인 신변잡기를 올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기왕 '세상에 딴죽 걸기'를 모토로 삼은 3M흥업이 있으니 여기선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를 써도 괜찮겠다 싶어집니다. 제가 겪고 있는 일상 역시, 영화나 세상사에 대해 쓰는 조금 더 공적인 글이나 말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테니 말이죠. 이는 또한 제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거니와, 이 초라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과 더불어 세상 살이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고민을 공유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일기를 쓰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신변잡기적 글쓰기에도 분명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지난 6월 말로 7년 가까이 몸 담았던 FILM2.0을 그만 두고, 프리랜스로 전업한 뒤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갑니다. 말이 좋아 프리랜스지 사실상 비정규직 노동자죠. 그러니 사람들이 제일 먼저 걱정하는 것 역시 먹거리더군요. 먹고 살만 하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네, 다행히(!) 아직은 먹고 살만 합니다. 지금은 몇 건의 기고 외에 사실상 방송 출연이 주 업무(?)인데, 6개 정도의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고 있으니 회사에서 받았던 월급 정도(때론 그보다 조금 많이)는 벌게 되더군요. 그러니 나름 행복한 비정규직인 셈입니다.

지난해부터 출연해온 부산  MBC의 '시네마월드'에 두 번의 개편에도 안짤리고 나가고 있고, 3M흥업 멤버들과 '시네 파파라치'라는 작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도 자체 제작중입니다. 수요일 오전 부산에서 '시네마월드' 녹화를 끝내면 점심도 거르고 부랴부랴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오후 4시 반 YTN '뉴스 큐'에 출연하기 위해섭니다. YTN은 뉴스 회사라 출연료가 비교적 짠 곳인데, 2년전 제가 출연료 인상을 요구하다 '짤린(?)' 경력이 이번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사실 영화 기자 입장에선 TV보다 라디오에 나가는 게 더 친밀하게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KBS 1라디오 문화 포커스에 나가 매주 목요일 밤마다 강추작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약간 점잖은 컨셉이라 슬쩍 좀이 쑤실 때가 있습니다. 해서 부산 MBC 녹화차 하루 먼저 내려간 화요일 밤에 현지 라디오 '별밤'에 나가 살짝 주접을 떨고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에는 KBS 순천 라디오로 전화 연결을 합니다. 저, 나름 전국구입니다.^^

프리랜스 전업 직후, 술자리에서 프리랜스 선배이신 시사 평론가 김방희 선생을 만났는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프리랜스의 '랜스'는 '창'이란 뜻인데, 원래 중세 용병에서 유래된 말이에요. 그 때 프리랜스들은 아군이든 적군이든 돈 많이 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싸워줬지요. '프리'의 참 뜻은 자유가 아니라, 마구 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KBS든, MBC든 부르는 데 가서 출연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디다. "프리랜스는 자유를 얻는 대신, 생활을 잃는다."

그 얘기를 전업 직후에 들어서 그랬는지, 저만큼은 자유도 얻고 생활도 잃지 않는 프리랜스가 되기 위해 나름 노력중입니다. 얼마전 라디오 출연 섭외가 왔는데, 토요일 방송이라길래 정중히 사양하며 그랬죠. "죄송합니다만 전 토요일에는 일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섭외 전화는 아침 8시에 나오라길래 "전 그 시간에 자야 합니다. "라며 또 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프리랜스 대선배이자 3M흥업 멤버 가운데 한명인 김태훈 씨가 "프리랜스로서의 자세가 안됐다"며 어이 없어 하더군요. 암튼 그래도 성질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얼마전에도 SBS 라디오 '이승연의 시네타운'의 고정 패널로 나갔다가 저와는 궁합이 안맞는다는 이유로 2주만에 출연을 중단해 버렸으니까요.

이래도 될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돈 때문에 아무데나 몸을 파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제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적어도 제가 신명을 내 일할 수 있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직장이라는 안정된 틀을 박차고 험난할지도 모를 들판으로 뛰쳐 나온 이유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다 제 진정성을 담을 수 있는 일들입니다. 특히 세 분의 지인들과 함께 시작한 3M흥업은 저의 든든한 집과도 같은 곳입니다.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방문자 300만 명을 넘기며 1인 또는 소수 미디어로서 새로운 매체 실험의 가능성을 열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진심을 투여하니, 아직은 크지 않지만 매체의 재생산 구조를 확보하기 위한 꽤 의미 있는 수익도 창출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들판에 나오니 때론 춥기도 합니다(ㅠㅠ). 일단 프리랜스가 됐더니 한국사회가 명함 사회라는 게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FILM2.0 편집장 시절에는 늘 가장 가운데였던 제 시사회 자리가 어느새 맨 앞이나 맨 뒤로 바뀌었습니다. 영화 홍보사에 전화를 걸어 "영화 기자 최광희라고 합니다" 하면, 대개는 "어느 매체세요?"하고 매우 사무적인 질문이 돌아옵니다. '프리랜스 영화기자'라는 소개에도 생소해 하는 반응은, "저...예전에 FILM2.0 편집장이었습니다"라는 구차한 설명을 건넨 뒤에야 비로소 "아, 네에~" 하면서 친절 모드로 바뀌기 일쑤입니다. 7년 동안 영화 기사를 쓰며 알고 지낸 분들은 이제 모두 이사님이나 실장님이 돼 버린 탓도 있겠지만, 한달에도 몇 번씩 "이번에 기자님이 쓰신 영화평을 저희 광고에 인용해도 될까요?"하고 살가운 친절함으로 전화를 걸어왔던 게 바로 엊그제인데, 소속 매체가 없어졌다고 대우가 달라지는 걸 보니 결국 내가 썼던 글이 광고에 착취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세상 참 야박하다는 생각도 듭디다. 얼마전에 블로그에 올린 <마이클 클레이튼> 영화평은, 해당 공식 블로그에서 퍼갔길래 들어가 봤더니 '네티즌 리뷰'라는 카테고리로 묶여 있더군요. 아, 그래 내가 네티즌이 됐구나. 이제 매체 권력에서 멀어졌구나, 하는 걸 절감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상황에 점차 적응을 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를 둘러싸고 있던 알량한 매체 권력의 후광이 다 헛것이었음을 깨닫고 있다고나 할까요. 사실 이런 건 별 문제도 아닙니다. 어쨌든 제가 만날 수 있는 독자들과 시청자들을 향해 진정성을 가지고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만이 정도라는 사실도 함께 느끼고 있죠. 이제 어떤 후광도 없이, 제 스스로가 언론 매체가 되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습니다.

변화에 적응을 해가니 자유의 맛도 훨씬 달게 느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전쟁에 시달리지 않는 것. 커피 한잔을 마시며 느긋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것. 매체 편집장이 아닌, 한 명의 네티즌으로서 훨씬 더 냉혹한 까칠함을 가다듬으며 블로그에 로긴하는 것, 이런 순간들이 모두 축복처럼 느껴집니다.
TAG 프리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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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슈테른 2007/12/05 1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M 흥업에 같은 글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도, 버릇처럼 이곳을 찾고 있었어요...
    어쩐지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고 싶어지네요... ^^;;;

    • cinemAgora 2007/12/03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개인 블로그에서 모처럼 댓글을 보니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 듭니다. ^^ 늘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주셔서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2. mips 2007/12/04 16: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젠가 이런 글을 쓰실 줄 알고 계속 기다렸었어요. 사진 때문인가요? 이전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보이십니다.

    • cinemAgora 2007/12/04 1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다려까지 주셨다니..제 무심을 깊이 반성중...전보다 좋아 보인다니 다행입니다. 아마도 자유의 대가인가 봅니다.

영화상 시상식, 차라리 영진위가 하라!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2/0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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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한민국 영화대상 시상식을 보면서 또 한번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시상식이 재미가 없다. 영화인들의 축제라지만, 방송국의 '생색내기용' 연말 이벤트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 뻘쭘한 행사가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기술상 부문의 시상 대목에선 대리 수상이 너무 잦아 보는 이까지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영화인들이, 특히 현장의 스탭들이 이 행사를 감독과 배우들만을 위한 대 언론 퍼포먼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이다.

행사의 미숙한 진행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따로 거론하기도 입 아픈 일이고, 명색이 한 해 동안의 한국영화계를 정리하는 이 자리는, 후보작 선정부터 대중 상업영화만을 위한 잔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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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괜찮은 평가를 얻었으나 흥행에서는 참패한 정윤철 감독의 <좋지 아니한가>는 아예 후보작 대열에도 끼지 못했다. <삼거리 극장>이나 <숨> <죽어도 해피엔딩>과 같은 저예산 수작들도 외면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큐멘터리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김명준 감독의 <우리 학교> 같은 영화는 또 어떤가.
출품이 안돼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겠지만, 왜 이런 영화들이 영화상 시상식을 남의 집 잔치로 생각하는지 곱씹어볼 일이다. 방송국 이벤트라는 한계 때문에, 시상 결과 역시 흥행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영화인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청룡영화상의 경우엔, 이미 시장에서 최고 흥행을 세운 걸 만인이 알고 있는 작품에게 굳이  '최다 관객상'을 건네며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준다.  

시상 결과 역시, 나눠 먹기나 안배의 흔적이 엿보인다. <밀양>이 출품을 거부한 지난 달의 청룡영화상의 경우,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에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몰아준 바 있다. 거꾸로 <밀양>이 4개의 상을 싹쓸이한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우아한 세계>는 단 한개 부문(남우주연상)의 후보에 올랐을 뿐 어떤 상도 받지 못했다. 시상식마다 심사 기준이나 심사위원들의 성향이 다른 결과라는 걸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저 시상식에서 걸작이 이 시상식에선 범작 취급을 받는 걸 보면서, 시상식의 권위란 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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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한국에서 영화상 시상식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 영화인협회가 주최하는 대종상이 고질적인 공정성 시비로 제일 먼저 권위 추락을 자초했고, 배우들 패션쇼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한 청룡영화상이나 용감하게도 '대한민국'을 자처한 MBC 영화대상도 영화계 안팎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세 영화상 모두 권위와 품격은 일찌감치 엿 바꿔 먹고, 아카데미 시상식의 겉모양만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직접 나서 명실상부한 최고 권위의 영화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지금까지 제기된 영화상의 모든 문제들을 해소하고, 대중 상업영화부터 저예산 독립영화까지 한국영화계 전반을 아우르며 제대로 된 권위의 영화상을 만들만한 주체는, 지금으로선 공적 성격의 영화계 대의 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영진위가 영화상 시상식의 후원을 맡는데 만족한 채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화계 잔치를 방송국과 신문사가 대신 하고 있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TAG 영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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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2/02 10:31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도쿄에 가본 건 스무 차례가 넘을 것 같다. 일 때문에, 혹은 그냥 놀러, 한 해에도 두 세 차례 씩 방문해온 도쿄는 어느 순간부터 내게 옆 동네와도 같이 친근하고도 편안한 도시가 됐다. 처음엔 한꺼번에 수 백 명의 시민들이 교차로를 가로지르는 시부야 거리의 모습이 엄청난 진풍경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거리에 서면 마치 명동에 온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신주쿠 뒷골목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헤매 다녔지만, 이제 그곳에 가면 단골 음식점을 찾듯 소문난 라멘 가게를 찾곤 한다. 방문할 때마다 도시의 느낌이 시나브로 바뀌어 간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그 공간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젠 새로움을 찾는다기 보다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게 내가 도쿄를 찾는 이유가 됐을 정도다.

그런데 도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익숙하게 다가오는 대상이 하나 있다. 바로 도쿄 타워다. 여기서 익숙함이란 앞서 말한 친근함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심드렁함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길에 언제나 만나게 되는 도쿄 타워를 바라보며 나는 별반 특별한 감흥을 얻은 적이 없다. 그냥 여느 대도시에나 우뚝 서 있을 법한, 그런 도시적 상징물이라는 것 외엔. ‘파리의 에펠 타워를 너무 벤치마킹했군’, ‘여하튼 일본 사람들은 서구적인 걸 좋아해. 저 특징 없는 탑을 왜 만들었을까’ 정도가 도심 안에 불쑥 솟아 있는 그 생뚱 맞은 철탑을 보며 든 생각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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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원제 <도쿄타워-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를 봤다. 제목과 달리 이 영화에서 도쿄 타워는 별로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거기에 단순한 조형물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도쿄 타워는 주인공(오다기리 죠) 아버지가 호기롭던 시절에 찍은 기념 사진의 배경이었고, 이제 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의 병실 창문의 배경이 된다. 아버지의 사진 속에는 지금의 절반쯤 높이까지 세워진 미완성의 도쿄 타워가 서 있다. 마치 저마다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도쿄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의 표상처럼. 과연 넉살 좋고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거기에 있다. 아들과 어머니에겐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가족을 책임질만큼 성실한 가장은 못됐다. 대신 넉넉한 낙천성을 무기로 홀로 탄광촌의 가난한 삶을 버티며 아들을 뒷바라지해 온 어머니는, 이제 유명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실에 누워 있다. 아들과 어머니는 함께 도쿄타워를 바라본다. 그것은 누군가에는 헛된 욕망, 누군가에는 거짓 없이 순수한 꿈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꿈은 다르지만, 누구나 같은 바람으로 그 탑을 바라 봤을 것이다. 이루거나 이루지 못함을 떠나, 함께 바라보며 같은 감흥을 공유할 수 있는 매개. 도쿄 타워는 그렇게 이 특별하지 않은 모자의 특별한 이별을 넌지시 굽어보고 있다. 

여행자의 시선은 이방인의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대상의 표피에만 머물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여행은 영화가 담지 못하는 삶의 구체성을 목격할 기회를 준다. 반대로, 영화가 여행에서 얻지 못한 통찰을 선사할 때가 있다. 내게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는 그 공간을 ‘구체적으로’ 살아온 이들의 마음에 비친 도쿄 타워의 이면적 의미를 되새길 기회를 줬다. 그리고 다음 번에 도쿄에 가면, 꼭 한번 그 탑에 올라가 보기로 결심했다.

*여행 잡지 '트래비'에 기고한 글입니다.

TAG 도쿄, 도쿄타워, 오다기리죠의 도쿄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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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스릴러를 닮은 2007 대선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1/30 12:02

스릴러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은근히 반전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브라이언 싱어의 걸작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뒷통수를 세게 때리는 의외의 반전이 영화 말미에 멋지게 기다리고 있다면, 설령 앞서 살짝 지루함과 짜증을 느꼈던 관객이라도 흔쾌히  면죄부를 발행한다.

사람들이 반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예상대로 흐르는 이야기가 지루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삶은,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돌발 상황의 연속이라는 것을 직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지금의 상황을 좀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 놓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혹은 거꾸로 반전에 의해 상황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급회전하게 되더라도, 그 또한 삶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불행의 반전은 행복이고, 가난의 반전은 부의 획득이며, 사랑의 반전은 이별이 될 것이다. 불합리한 세상에 구역질이 난다면, 우리는 좀더 거시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정 부패의 반전은 정의와 양심이며, 독재의 반전은 민주주의이고, 분단의 반전은 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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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클레이튼> 토니 길로이, 2007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원제 STORY, 황금가지)에 따르면, 반전의 쾌감은 기대와 결과 사이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증대한다. 때문에 가장 큰 반전은 영화의 절정부에 자리잡기 마련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흐름을 일순간에 전복시킴으로써 관객을 얼얼하게 만들기 위해선 결말 직전에 반전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까닭이다. 최근 개봉한 <세븐 데이즈>나 할리우드 영화 <마이클 클레이튼>은 이같은 반전의 미학을 비교적 훌륭하게 구사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런 드라마틱한 반전의 미학을 굳이 영화에서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세상이 온통 반전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대선이 결말 직전, 즉 절정에 이르면서 'BBK 주가 조작 사건 수사 발표'라는 의미심장한 반전이 예고되고 있다. 한쪽에선 싱거운 반전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한편, 또 한쪽에선 그것이 지금까지의 흐름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초강력 반전이 되기를 노골적으로 고대하고 있다. 기대와 결과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반전의 효과는 증대될 게 분명하다. 감독을 맡은 검찰이 어떤 반전을 준비했을까, 숨이 꼴깍 넘어간다. 계약서와 도장이라는 '복선'이 이 반전에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 조마조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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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올리버스톤, 1996

대선이 반전 스릴러를 닮았다는 것은 씁쓸한 노릇이지만, 동시에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한 나라의 권부를 결정하는 일을 불과 몇 십일 앞두고 거대한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올리버 스톤의 <JFK>나 <닉슨>을 능가하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정치 스릴러가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매일 뉴스를 통해 중계되고 있다.

아무래도 지난 2002년부터 대한민국 대선은 반전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국민들에게 흥미진진한 볼거리와 역전의 드라마를 함께 선사하겠다는, 위정자들의 엔터테이너적 발상이 이토록 가상한데, 누가 이번 대선을 재미 없다 나불대는가.

이 흥미로운 반전 스릴러의 최종 결말은 12월 19일 알 수 있다. 다만, 유권자들이 그 순간의 반전을 연출할 '감독'이 될지, 결말을 관조할 '관객'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최고의 반전이 아니겠는가.

TAG BBK 주가 조작 사건, JFK, 닉슨, 대선, 마이클 클레이튼, 반전,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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닯고 싶지 않은 '아저씨 증후군' 톱10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1/28 21:29
한국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어감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줌마'가 아닐까 싶다. 아줌마가 어때서?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상하게도 아줌마 하면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될 때가 많다. 억척성과 천연덕스러움, 또는 매너 상실이라는 요소로 아줌마들을 특징화하고 조롱하는 농담들까지 떠돌 지경이다. TV매체들은 안그런 척 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더욱 조장한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아줌마 보다 아저씨들이 더 심각하다. 더더욱 내 자신이 내일 모레 불혹을 앞둔 입장에서, 내게 아저씨들의 '안습 백태'는 일상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나 역시 아저씨가 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죽어도 닮고 싶지 않은, 나름대로 생활 속에서 체득한 아저씨 증후군 톱10을 뽑아봤다.


1. 식당이나 서비스 업소 종업원에게는 일단 반말을 한다.
-->여자 종업원한테는 무조건 '언니'라고 부른다.

2 . 시간 장소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골프 스윙을 연습한다.
 -->특히 사우나에서 벌거 벗은 채 하는 스윙은 가관이다.

3. 전철에서 '쩍벌' 다리로 수컷 본능에 충실하게 '나와바리'를 확보한다.
 -->가운데를 막대기로 팍 찔러 버리고 싶다.

4. 술자리에서 폭탄주 돌릴 때만 남녀 평등을 부르짖는다.
-->요즘 남자보다 술 센 여성들 많다. 그러다 큰 코 다친다.

5. 두번 이상 술자리를 하면 형 아우 하자고 한다.
-->사돈에 팔촌 건너 건너까지 연결시켜서 필사적으로 인맥을 확보한다.

6. 운전석에만 앉으면 전투적이 돼 '개새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본인도 가끔 개처럼 운전하면서.

7. 운동할 때 반바지 차림에 종아리까지 바짝 올린 검은 양말을 신는다.
-->운동복 상의를 하의 안에 넣어 안그래도 나온 배를 팽팽하게 과시하기도 한다.

8. '누가 뭐래도 박정희 때가 좋았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에 끌려가서 한 일주일 고문 당하고 나오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9. 휴대폰을 무전기로 착각하고 큰 소리로 통화한다.
-->내 경험상 휴대폰 매너는 중년 아저씨들이 가장 없다.
 
10. 신문에서 읽은 지식이 꺼낼 수 있는 화제의 전부다.
--> 처세술이나 재테크 관련 서적 한 두권이 연간 독서량의 전부다. 

#Bonus. 내 직업이 영화 기자라고 하면 박철과 옥소리 사건의 진실이 뭐냐고 묻는다.
-->나 연예 기자 아니거든요?!

내가 사는 집에서 한 20분 걸어가면 늘 단골집처럼 드나드는 포장마차가 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집이다. 이집 아저씨는 진국이다. 깡 마른 체구에 단골 손님이 와도 립서비스용 친절을 부릴 줄 모르는, 굉장히 수줍음이 많은 분이지만 가끔 사람 좋게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인간성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아무리 포장마차라 해도 휘뚜루마뚜루 안주를 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가장 신선한 재료를 적당한 양만 들여와 정성스레 손질을 한다. 그래서 늦게 가면 안주들이 동나기 일쑤다. 싱싱한 생선을 세심하게 다루는 아저씨의 칼질은 <식객> 저리가라다. 대신 안주가 무척 더디게 나온다는 단점만 참을 수 있다면, 그 집 회맛은 왠만한 일식집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맛있는데다 가격도 경제적이다. 이를테면, 그는 내가 닮고 싶은 아저씨 가운데 한 분이다. 나대지 않고도 최상의 결과물로 실력을 증명하는 것. 설레발치지 않고도 사람을 끌어 들이는 넉넉한 품성. 그가 얼마전에 '생존권 사수'라는 글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장사를 하시길래,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을 통과하고 계신가 했는데, 결국 한동안 포장마차가 서지 않았다. 보름 가까이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그 주변을 기웃댔다. 며칠전 포장마차가 다시 섰다. 예의 환하고도 수줍은 얼굴의 아저씨가 열심히 횟감을 다듬고 있었다.
TAG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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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학원가)의 황당한 저주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1/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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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황당한 저주> 에드가 라이트 감독, 영국, 2004


어김 없다. 오늘도 좀비들은 거리를 습격했다. 새벽 1시. 똑같은 옷을 입은 좀비들이, 그들 세계의 관용어인 것으로 보이는 '존나'라는 단어가 꽤 많이 섞인 언어로 재재 거리며 사방 팔방의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다. 쾡한 눈, 무척이나 허기져 보이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대로 주변 음식점들을 기습한다. 별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듯 이미 거리 바깥까지 가판을 내어 '붉은 물이 든' 무언가를 잔뜩 내놓은 음식점들. 좀비들은 선혈과도 같은 붉은 국물을 뚝뚝 흘리며 게걸스럽게 먹는다.

삽시간에 인도를 장악한 좀비들은 마침내 차도를 장악한 수 십대의 버스 안으로 쓸려 들어간다. 일군의 다른 좀비들은 차도를 거의 완전히 막고 늘어서 있는 자가용차에 실린다. 그렇게 좀비들이 사라졌지만, 방금 그들이 쏟아져 나왔던 건물 안에는 여전히 소수의 좀비들이 남아 있다.

건물 벽에는 수 백여 명의 좀비들이 나란히 찍혀 있는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외고 2백명, 민사고, 영재고 5명 합격' 이건 필시 좀비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암호임에 틀림 없다. 옆에는 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 '왜 12살에 토익을 시작해야 하나?" '12'라는 숫자와 '토익'이라는 단어의 연관성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역시 좀비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암호일 것이다. 흠...글귀 너머 12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 좀비가 여전히 학원 로비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새벽을 지새우며 정글의 법칙을 새기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꽤 유명한 학원가 밀집 지역이다. 약 1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 양쪽에 빼곡하게 학원들이 들어차 있다. 간혹 인적이 드문 늦은 밤 거리에서 호젓한 산책을 즐기곤 하는 나는, 부지불식간에 학원가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당황하곤 한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갑자기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학원 수강생들의 인파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고교생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중학생들이다. 그리고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가 아이 티를 벗지 못한 학생이나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끼어 있다.

자라나는 꿈나무들을 '좀비'에 비유했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내 눈에 가끔 그들은 좀비(살아 있는 시체)처럼 보일 때가 있다. 새벽 1시가 넘는 시각에 집이 아닌 학원에서 공부를 한 뒤 떼로 학원 버스나 부모가 몰고 나온 승용차에 실려 귀가하는 중고등학생들의 모습은, 도저히 내가 가진 '상식의 영역'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래서 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침 8시 등교라면 적어도 7시엔 일어나야 할텐데, 집에 가서 씻고 어쩌고 하면 2시에나 잠들텐데, 그러면 5시간도 못자고 학교에 가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 본 TV 시트콤에서 학원에 와서 졸고 있는 학생에게 강사가 "너 학교에서 뭐 하고 학원 와서 자!"라고 호통 치는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통찰적인 대사였던 셈이다.

지금 사교육의 팽창이 어느 지경까지 와 있느냐를 교육 현실의 구조적 모순과 연계해 시시콜콜 따지고 있는 일은 멍멍이 귀에 맹자왈 공자왈 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이니, 과문한 나까지 가담할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다만 이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나는 제 정신이 아닌 것을 넘어 미쳐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눈 맑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을 새벽 거리의 쾡한 좀비로 만들고 있는 현실이 무섭고 식겁할 뿐이다. 얼마전에도 한강 남서쪽 좀비들의 반란이 신문 지상을 뜨겁게 달궜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채택하지 않은 교육 주체들의 사고 체계에는, 이기느냐 지느냐, 밟느냐 밟히느냐, 목소리를 키우느냐 줄이느냐, 미느냐 밀리느냐, 붙느냐 떨어지느냐의'정글 함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니 별 일 아니라고 치부해 버리면 속 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무섭다. 이런 상황이 내일도 계속될 것 같기 때문에 무섭다. 쾡한 눈으로 새벽을 지새운 결과,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을 유일무이한 생존 원리로 체득하게 된 꼬마 좀비들이 미래의 권력을 쥐게 될까봐 무섭다. 그래서 훔치고 떼먹고 속이고 말바꾸기로 일관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글 법칙의 달인들, 죽여도 죽여도 선거때마다 되살아나 비치적거리며 걸어오는 저 늙고 흉측한 좀비들의 유전자를 상속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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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영화 속 사랑의 발효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1/17 10:34

사랑은 김치와 같다. 익어야 제 맛이다. 물론 겉절이 좋아하는 분들 계시겠지만, 삭힌 홍어의 맛을 아는 자만이 삼합을 논할 수 있는 것처럼, 익은 사랑의 맛을 아는 자만이 삐리리의 순간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선언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이 익기 위해선 얄궂게도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삐리리의 전류가 흐른 뒤, 초보 연인들에겐 시련이 닥친다. 그 시련은 여러가지 양태로 사랑의 숙성 과정을 끊임 없이 괴롭힘과 동시에 숙성시킨다. 아이러니지만 그렇다. 고통은 사랑을 방해하고 한편으로 돕는다.

우리가 여러 매체를 통해 가장 많이 보는 고통의 사례는 바로 양가 부모의 반대다. 흔히 TV 드라마에서 상투적으로 써 먹는 설정이다. 요거 좀 낡았다. 요즘 세대 부모가 반대한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거대한 유산에 신경 쓰는 마마보이, 마마걸들이라면 모를까. 게다가 부모들도 개화돼 애들 연애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시기는 지났다. 오히려 서른이 넘도록 시집 장가 못가고 있는 자식들 등 떠민다. "길거리에 치이는 게 여자고 남자인데, 넌 그 흔한 연애도 못하고 뭐하니, 이 화상아!" 혹은 "아무하고나 빨리 좀 가라!" 심지어 이미 혼인한 자식에게 간혹 새 삶을 종용하는 급진적인 부모들도 적지 않다. "김서방 못쓰겠더라. 이혼해라." 그러니 이런 설정, 영화에선 안 쓰는 게 지당하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건과 첨예한 갈등의 사례를 통해 삶을 은유하는 매체다. 부모님 반대는 요즘 사건도 아닌 것이다.

또 한가지 흔한 것. 실 생활에서도 아마 가장 흔한 고통일 것이다. 성격 차이다. 요거 별 것 아니겠지만 쥐약이다. 양식 먹고 싶은데 일식 타령하고, 지하철 타자 하면 버스 타자면 처음엔 그래 그래 하다가도 은근히 짜증이 돋는다. 잠 잘 때 사랑해, 아침에 일어나서 사랑해,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해 들어야 되는 여자에게 무뚝뚝한 남자는 천벌이다.

흔하고 흔한 게 성격 차이니 이건 로맨스 영화의 고통 소재로 삼기엔 함량 미달이라 생각하시면 오산이다. 말 된다. 왜? 알콩달콩의 드라마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로맨스 영화들은 현실적인 관계들을 선호한다. 부모님 반대, 그딴 낡은 거 아니라면 성격 차이로 인한 티격태격은 재미 있다. 무엇보다 웃음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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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 원작의 <오만과 편견>의 리지와 미스터 다아시. 서로들 잘난 선남 선녀다. 리지는 코가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의 대명사다. 사랑이 없는 결혼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자유 연애의 신봉자다. 그러던 그녀가 혼인 시장의 '대 놓고 삐리리 조장 행사'인 댄스 파티에서 다아시를 만난다. 멋있는 녀석이다. 끌린다. 어김 없이 스파크가 터진다. 그런데 오해가 생긴다. 리지는 그가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는 말을 엿듣는다. "봐줄 만하지만 날 매료시킬 정도는 아냐." 이거, 직격탄이다. 게다가 다아시가 그녀의 가문을 업신여겼다는 혐의를 사실 확인도 안하고 믿게 된 엘리자베스는 그를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찬 속물로 단정한다. 그리고 예의 티격태격. 지금 같으면 핸드폰으로 몇 번 통화하면 풀릴 오해지만, 둘의 만만치 않은 성격은 첨예한 대립을 조장한다. 싸우다 정든다 하던가. 둘의 오해는 어느 억수같이 비오는 날, 키스 신공 한 방으로 눈 녹듯 사라진다. 오해가 풀린 탓도 있지만 다툼 속에서 서로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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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도 두 남녀의 성격 차이를 코믹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똑똑하고 젠틀하지만 체질적으로 연애를 못하는 대학 강사 황대우(박용우)앞에 매력적인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미나(최강희). 데이트를 시작했지만 이 미나라는 여자 알다가도 모를 인물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성격 차이가 아니라 '성적 차이'다. 뻑하면 혈액형으로 사람 성격을 단정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모른다. 시쳇말로 개념 상실한 여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 뭔가 비밀을 숨겨 놓은 것 같은데, 황대우는 수컷적 본능적으로 코를 킁킁댄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녀의 키스에 뻑이 간다. 개념이고 나발이고 무소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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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차이는 그러나, 비교적 쉽게 극복될 수 있다. 더 큰 고통은 상대방이 안고 있는 내면의 상처다. 그리고 그 상처는 상대방에게 또 다른 생채기를 내기 일쑤다. 니콜라스 케이지 아저씨가 지금보다 머리가 덜 벗겨졌을 때 찍은 걸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시라. 주인공 벤, 실직에 알콜 중독, 가족은 풍비백산. 덧 없는 인생이다. 라스베가스로 흘러든 그는 죽을 때까지 마시기로 작정한다. 그런 그에게 거리의 여자 세라가 나타난다. 둘은 동거를 시작한다. 조건이 있다. 서로에게 잔소리 안하기.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방어막이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인가. 사랑이 깊어질 수록 잔소리도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일부러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나 결국 둘은 각자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교훈! 상대방의 상처를 결코 방임하지 말라. 상처는 핥아 주어야 낫는다. 그리고, 그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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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키 류이치가 감독한 일본 영화 <바이브레이터>도 마찬가지다. 환청이 들리는 병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작가가 여주인공이다. 어느날 편의점에 갔다가 준수하게 생긴 트럭 운전사에게 삐리리됐다. 다짜고짜 생면부지의 운전사가 모는 트럭에 올라탔다. 그리곤 함께 여행을 한다. 여자는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말하지 않을 뿐, 남자는 그녀가 품은 내면의 상처를 직감한다. 그는 캐 묻는 대신 보듬는다. 그녀에게 필요한 게 기대어 쉴 어깨라면 그는 흔쾌히 어깨를 내준다. 그 과정을 겪으며 여자는 서서히 잃었던 자아를 찾아낸다.

가장 많은 로맨스 영화에서 등장하는 고통의 설정은 무엇일까.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불치병이다. 그만큼 사랑의 숭고함과 영원성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기에 불치병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만 해도 <선물> <국화꽃 향기> <내 머리속의 지우개><사랑하니까 괜찮아> 등 신파 멜로물의 단골 소재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게 또 이 불치병이다. 그런데 왜 불치병은 하필 여자가 걸릴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 그렇다. 항구가 병이 들면 배는 옴짝달싹 못한다. 그게 순리다. 말 안된다고? 좀더 실질적인 이유를 대볼까? 멜로 영화의 주 관객층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감정이입을 유발하기 위해선 병든 남자보다 병든 여자가 더 설득력 있다.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할 이의 입장이 슬픈지, 사랑하는 이를 남기고 떠나야 할 이의 입장이 슬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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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최근작 가운데 <너는 내 운명>을 사례로 꼽았다. 이 영화는 지독한 신파 멜로다. 그런데 흥행에 빅 히트를 기록한 것은 순전히 이 없을 법한 이야기가 실화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직도 존재하다니, 관객들은 그 사실에 흔쾌히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아시다시피 전도연이 연기한 은하는 직업 여성이라는 이유로 에이즈에 걸렸다. 석중(황정민)은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그의 위대한 사랑은, 이들을 갈라 놓으려는 세상의 편견과 거대한 벽을 훌쩍 뛰어 넘는다. 우리들은 간혹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묻지 않던가. "나 병 걸려서 죽을 때 너 나랑 같이 있어 줄거지"? 죽음의 두려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같이 한 삶의 기쁨 때문에 사별조차 흔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 필요한 진짜 이유라는 걸, <너는 내 운명>은 설파한다. 신파지만 울지 않을 수 없는 신파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우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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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민은 복도 많지. <너는 내 운명>에서 전도연을 안더니, 최근작 <행복>에선 임수정을 차 버렸다(새로 찍는 영화에선 전지현이란다! 이런 된장!). 두 영화, 설정 면에서 비슷하다. 이번에도 여자가 불치병이다. 악성 폐질환을 앓고 있는 은희는 방탕한 생활 덕에 간경변에 걸린 영수한테 끌려 살림을 차린다. 한동안 깨 소금이 쏟아진다. 죽고 못 산다. 그런데 영수에게 딴 마음이 생긴다.  살신성인의 헌신으로 그의 병을 낫게 해준 은희가 정작 그 자신의 병 때문에 식사도 깨작깨작 하는 게 못마땅해진다. 이쯤 되면 인간 말종이다(남자 입장에선 살짝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헴). 불치병은 서로를 더욱 강한 연대의 끈으로 묶어주는 구실을 하지만, <행복>은 그 반대의 현실을 비추고 있어 잔인한 영화다. 잔인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끝끝내 신파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은희는 끝까지 영수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죽음의 순간에 함께 있기로 한 약속을 지켜낸다. 그러나 그건 영수가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과도 같은 의식처럼 보인다. 은희는 영수에게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게 함으로써, 남은 생애에 결코 치유되지 않을 거대한 회한을 남겨준 셈이다. 회한으로 점철된 외로운 죽음, 그게 영수에게 남겨진 쳔형이다.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고통은 사랑의 이음동의어다. 고통에 굴복하면 사랑은 신기루가 된다. 극복한다면? 글쎄...조용히 곁에 찾아온 그 무엇이 일상의 매 순간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있음을 깨닫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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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라디오 '이승연의 시네타운' 출연 초고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앞으로 몇 번 더 연재할 생각이었으나 아쉽게도 속 좁은 필자가 궁합이 안맞는다고 판단한 시네타운 출연을 중단해 로맨스 영화 시리즈는 여기서 그만.^^                                                                                                cinemAgora
TAG 너는 내 운명, 달콤 살벌한 연인,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로맨스, 바이브레이터, 오만과 편견,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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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와 그를 추억함

기자, 씻나락 까먹는 소리 2007/11/17 10:33
 
<색, 계>의 양조위에 빠져든 분들 주변에 많다. 그들과 양조위의 매혹을 공유하기 위해 필자가 4년 전 <무간도>의 홍보차 내한한 양조위를 인터뷰한 뒤 FILM2.0 인터넷 사이트에 실었던 묵은 칼럼을 끄집어 낸다. 참고로, 글 중에 나와 함께 땡땡이를 쳤던 선배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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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언론사 스포츠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cinemAgora


영화 <씨클로>를 봤던 기억이 난다. 96년이었던가, 방송국의 스포츠 뉴스 AD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매일 밤 생방송을 위해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었던 차에 하루는 PD를 맡았던 선배가 제안을 해 왔다. 방송을 세 시간 여 남겨 놓고 갑자기 <씨클로>를 보러 극장에 가자고 하는 게 아닌가. 마침 저녁 경기가 없었던 날이었으므로 방송 준비는 대충 마무리 돼 있었던 지라 흔쾌히 선배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회사에서 약 10분 거리에 떨어진 극장에서 마지막 회 입장권을 사 <씨클로>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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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 1995

한 해 전쯤 봤던 <중경삼림>의 강렬함을 잊지 못했던 나는 끈적끈적한 베트남 호치민시의 거리를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매춘을 강요해야 하는 시인으로 분한 양조위의 그 비애 가득한 눈빛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을 고스란히 담아내던 그는 자신에게 드리운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기야 불꽃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 처절함과 처연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즈음, 문득 방송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영화는 끝날 줄 모르는데 시계를 보니 생방송 30분 전이 아닌가. 내 재촉에 못 이겨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난 선배는 끝내 극장 문을 나서지 못하고 작게 속삭였다. “엔드 크레딧 올라갈 때 뛰기 시작하면 방송 5분 전에는 회사에 도착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보자. ” 바로 뛸 채비를 하고 문 옆에 달라 붙은 채 우리는 <씨클로>의 남은 부분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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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1994

다행히 그날 방송 사고는 없었다. 생방송 2분 전에 도착한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진행을 끝냈고, 영화도 보고 방송도 무사히 끝낸 데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일은 다음 날 아침에 벌어졌다. 부장에게 불려 간 우리의 눈 앞에는 ‘선동렬, 10세이브’(로 기억된다)라는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의 스포츠 신문 세 장이 던져졌다. 우리가 <씨클로>를 보고 있는 사이, 당시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맹활약 중이던 선동렬 아저씨는 또 하나의 세이브를 올렸던 것이고, 생방송 2분 전에 도착한 우리에겐 당연히 그 뉴스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부장에게 실컷 깨지고 나오는 길에 선배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양조위의 <씨클로>를 봤는데 이 정도면 약과지, 안그래?”

지난 화요일, 그 때 뉴스를 빼 먹어 부장에게 혼나게 만들었던 장본인, 그 끈적끈적한 비애감으로 온통 가슴 속을 헤집던 장본인을 7년여 만에 처음으로 직접 봤다. <무간도> 홍보차 한국에 온 양조위를 시내 한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그에게 ‘내가 당신 영화를 보려고 얼마나 곤욕을 치른 줄 아느냐’며 옛 해프닝을 자랑처럼 늘어놓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으나 인터뷰 일정에 쫓기는 그에게 그런 얘기 했다간 욕 먹기 십상일 듯 했다. 직접 만난 그는 꽤 왜소했다. 170센티미터가 넘지 않을 것 같은 키에 깡 마른 체구는 <화양연화>의 그 젠틀한 매력이 사기였군, 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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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000

턱과 코 밑을 듬성 듬성 덮고 있는 털이 아니었다면 “그 양반, 참 예쁘장하게도 생기셨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유약한 표정. 동료 배우 유덕화와 나란히 앉은 그는, 유덕화의 유창하고 또렷한 대답이 흘러 나오는 동안 손에 쥔 꼬깃꼬깃한 종이 한장을 양쪽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내내 만지작 댄다. 못 알아 듣는 중국어이니 망정이지, 질문을 해도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울컥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그 깊은 눈의 소유자는 같은 남자의 시선으로 봐도 확실히 매력적이다. 유덕화에겐 미안한 얘기이지만 그가 대답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난 슬쩍 슬쩍 양조위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나,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고심하는 듯한 그는 최대한 말을 아낀다. 그날 그의 말투는 꽤 진중하고 느렸는데, 그런데도 통역사는 그가 <영웅>의 흥행 소식을 전해 듣고 고무됐는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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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 2002

생각해보니, 양조위의 매력은 그 본연의 모습이 그가 맡았던 영화 속 캐릭터들의 현시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자기 방에 팬티 차림으로 누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중경삼림>의 실연당한 순찰경, 표정 없는 얼굴로도 한 없는 고통을 표현하던 <씨클로>의 불행한 시인, 금지된 사랑을 앙코르와트의 구멍 속에 속삭여 잠가 버렸던 <화양연화>의 남자가 한 인물에 고스란히 녹아 거기 앉아 있었다. 그의 몸집과 표정은 그 자체로 세상의 질서에 지쳐 있는 비애감의 여러 스펙트럼을 미분해 받아 안고 있는 듯 보였다. 칸 영화제가 인정한 그 세계적 배우는 그렇게 당당하지도, 그렇게 세련되지도 않은 인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스타 배우들이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와는 전혀 상관 없는 표정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것 자체가 엄청난 카리스마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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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2003

인터뷰 중 한국에서 40대 이상의 배우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데 대해 말들이 오갔는데, 유덕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