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언젠가 이사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장기 접속 불가 사태(?)를 계기로 블로그를 티스토리로 이사했습니다.
주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 블로그를 구독하고 계시거나 즐겨찾기 해두신 분들께 수고로움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만 새 주소로도 자주 왕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cinemagora.tistory.com
cinemAgora | 최광희 드림.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FILM2.0 온라인 편집장 시절, 회사는 몇 명의 간부 사원들에게 각자의 블로그 오픈을 지시했다. 경쟁 매체들이 블로그를 통한 커뮤니티 활성화에 앞다퉈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도 회사 이름만 미디어2.0이지 기실 2.0적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더디게 반응해 왔던 회사로서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감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블로그란 게 네티즌들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해소해주기 위한, IT 자본의 상업적 전술의 일환이라고 믿었기에, 나조차 블로거로 나선다는 게 영 못마땅했다. 지난해 말 'behind boxoffice'라는 제목의 블로그를 오픈시켜 놓고,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쓸까 고민했다. FILM2.0이라는 영화 전문 매체와는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나 어떤 것이 블로그적 글쓰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 않을 때는 미처 몰랐던 블로그의 매력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블로그 공간이 방문자들과의 더욱 친밀하고도 유연한 소통과 토론의 장으로써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순간부터였다. 방문자들의 애정어린 댓글과 관심어린 제언들은 내게 자연스레 블로그적 글쓰기의 방향성을 일깨웠다. 어렴풋하게나마, 나는 블로그가 팩트와 정보보다는 이슈와 관점의 매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므로 블로그 글쓰기는 세상의 제반 현상을 나의 세계관으로 걸러낸 지극히 주관적인, 그러나 타당성 있는 관점을 밀어 붙일 수 있어야 한다. 독특하고도 개성 넘치는, 그러나 설득력 있는 관점들이 하나의 거대한 강물을 형성했을 때, 비로소 객관적인 아젠다가 만들어진다. 모래알이 언덕을 만드는 것과도 같은 블로그 저널리즘의 형성 과정인 것이다.
김경찬 피디, 그리고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씨와 의기투합해 팀 블로그 3M흥업을 오픈하고, 다음 블로거 뉴스에 참여하면서 블로그가 기존 매체를 압도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 팀블로그를 오픈한 지 6개월이 조금 지난 지금, 누적 방문자수 400만 명을 눈앞에 두게 됐다. 세상에! 일개 블로그에 우리나라 인구 10명 중 1명이 방문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소수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능가하는 대중 흡입력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다.
허나 여전히 장벽은 남아 있다. 블로그를 아마추어리즘의 범주 안에 묶어 놓고 개별 블로그의 브랜드화를 애써 폄훼하려는 시각들 말이다. 여전히 메타 블로그나 포털 편집자들의 간택에 의존해야만 트래픽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불안정성도 한계라면 한계다. 네이버가 전략적으로 오픈한 블로그 '이동진 닷컴'처럼 안정적인 트래픽을 보장 받으며 미디어적 영향력을 확보해낼 수 있느냐가, 3M흥업에게 주어진 다음 과제라 하겠다.
내가 만약 블로그에 인터뷰 글을 쓰겠다며 유명 영화 감독이나 배우를 섭외하면 영화 마케터들은 콧방구도 안 뀔 게 분명하다. 네이버의 든든한 재정적, 트래픽 백업을 받고 있는 '이동진 닷컴'이라면 또 모를까. 이동진 선배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3M흥업도 그에 못지 않은 차별적 퀄리티를 지녔다고 감히 자부하고 싶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품성을 인정 받아 낙점되는 길이 아닌 개척의 길을 택한(나는 이 개척의 과정이 진짜 블로그적인 성장 모델이라고 믿는다) 우리로선 더 다양하고 풍부한 컨텐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할 때 슬쩍 답답증이 몰려 온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우리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싶다. 겉모습만 블로그이지 알맹이는 기존 미디어의 방식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블로그 특유의 접근 방식으로 기존 매체의 지리멸렬함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대안적 미디어의 길을 끊임 없이 모색할 작정이다. 잘 될른지 모르겠으나 블로거로 참여한 지 1년이 되어 가는 지금, 희미하게나마 그 희망이 보인다.
창의력 부족? 그걸 누가 모르나! 양극화 환경, '죽이는 컨셉트' 발명에 사활을 걸고 영화평과 상품후기가 다르지 않은 시대,
연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몇 군데서 섭외 전화가 걸려 온다. 2007년 영화계를 결산해 달라는 방송 프로그램들의 인터뷰 요청들이다. 매년 되풀이 되는 얘기들이지만 올해만큼은 부쩍 ‘부진’이니 ‘위기’니 하는 단어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 충무로의 체감 경기를 언론이 실감할 만큼, 현상적인 지표들이 심각해 졌다는 반증이다. 예전엔 그냥 좀 들었다고 말할 수준인 200만 명 돌파 영화가 가물에 콩 나듯 나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실감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위기의 원인 분석에 대해선 여전히 수박 겉 핥기에 머물고 있어 답답하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했는데, 이런 질문이 날아 왔다. “한국영화들이 요즘 시장에서 잘 안 통한다는 것은, 관객들이 그만큼 똑똑해졌다는 의미이겠죠?” 나는 약간 심사가 뒤틀린 끝에 이렇게 내뱉었다. “그거 설명하려면 굉장히 긴데요. 일단 현상적으로는 이래요. 관객들이 똑똑해진 게 아니라 영화가 멍청해진 거라고 보는 게 맞아요. 영화가 멍청해지니 관객들도 따라서 멍청해지고, 또 그 멍청한 수준에 맞추다 보니 영화가 더 멍청해지는 일종의 악순환이 되고 있는 것이죠.” 그랬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의 피디는 “방송에 쓰긴 좀 거친 표현”이라며 “점잖은 어투로 다시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한다. 나도 점잖게 말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 충무로의 상황이 ‘에헴’ 하고 있기에 하도 답답해서 그랬다.
한국영화 위기론이 고개를 들 때마다 ‘관객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충무로의 창의력 부족’이라는 분석은 전가의 보도처럼 쓰여 왔다. 충무로가 예전만큼 똘똘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충무로가 언제 그렇게 똑똑했었나? 그런 결론은, 너무 편리하다.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추론이다. 명색이 언론이라면 이면의 구조를 살펴야 하는데, 한국의 주류 언론은 구조와 맥락을 살피는 데는 그다지 부지런하지 않다. 들여다 보면 골치 아프고, 독자와 시청자 역시 골치 아플 게 뻔하니, 관객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맞출 참신하고 새로운 영화가 절실하다고 짐짓 정색하고 끝내면 세련되고 깔끔해 보이는 줄 안다. 그런데 그걸 누가 모르나?
사실상, 지금 한국 영화 산업의 불황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극장 수익에만 편중된 왜곡된 수익구조와 스크린 독과점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데서 야기됐다고 믿는다. 주지하다시피, 부가 판권 시장은 사실상 고사 직전이다. 이제 와서 대책 마련에 분주하지만 외양간을 고치기에 너무 오래 전에 소를 잃어 버렸다. 해외 시장도 1~2년전까지 한류 현상에 힘입어 반짝했을 뿐 기대만큼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수 시장, 그것도 극장 뿐이다. 좁은 방안에 쥐를 가둬 놓듯, 얼마 안 되는 스크린을 놓고 한 주에도 십 수 편의 영화들이 경쟁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독과점 상황이 벌어졌다. 스크린 싹쓸이를 통해서라도 단숨에 많은 관객을 동원하려는 대형 배급사들과 극장들의 이해 관계가 일치했고, 그러다 보니 흥행 양극화 현상이 벌어졌다. 극소수의 ‘되는 영화’와 대부분의 ‘망하는 영화’로 양분된 것이다. 영화 시장 역시 2대 8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험악한 정글이 됐고, 2006년과 2007년을 거치며 그 정글 법칙은 더욱 고착화됐다.
양극화 환경은 개별 영화의 실패 확률을 그만큼 높이게 된다. 위험도가 올라가니 무리수를 둔 마케팅이 횡행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영화의 컨셉트와 필수적인 정보마저 가려 버리고, ‘일단 동원하고 보자’ 식의 막가파식 홍보는 ‘낚시 마케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설령 관객들의 배신감을 야기할지라도 치고 빠졌으면 그만이라는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다. 관객들은 ‘낚였다’고 한탄하고, 인터넷 영화 평점은 마케팅 방법론에 대한 성토장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적지 않은 관객들은 돈 아끼고 시간 아끼기 위해 왠만하면 불법 다운로드라는 안전 장치를 활용하자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이통사 할인도 대폭 축소됐는데 일부러 극장까지 갈 수고를 감수할 만한 화끈한 영화가 별로 자주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니 부가 판권 시장은 물론, 최후의 안전지대였던 극장마저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투자 배급사와 제작사들은 물론, 최근엔 극장들마저 가파른 수익률 저하로 울상을 짓고 있는 상황은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해 영화 시장의 악순환 시스템을 두고 본 대가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기획 영화나 대중 상업영화들이 취할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어떻게 해서든 관객들의 호기심을 일거에 가로챌 ‘죽이는’ 컨셉트를 발명하는 일에 사활을 걸게 된다. 설득력 있는 스토리나 영화적 완성도는 차후의 문제가 된다. 2년 넘게 시나리오 개발하는 시간이면 차라리 팔릴만한 이야기를 싼 값에 수입하는 게 낫다는 계산에 따라 리메이크작들이 범람한다. 너도 나도 요즘 잘 나간다는 일본 원작들을 사들이기 바쁘다. 그나마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승부를 거는 영화들은 이르면 투자 단계에서, 늦으면 배급 단계에서 ‘흥행성 없음’이라는 주홍글씨를 받고 나자빠진다. 도대체 창의력을 발휘할 멍석이 깔리질 않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충무로에 ‘창의력을 좀 발휘해봐’라고 질타하는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적 발상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지난 2006년 여름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한창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을 때, 극장들이야 그렇다 쳐도 영화진흥위원회와 일부 제작자들, 배급사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시장 논리’를 근거로 독과점 규제론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시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 스크린 쿼터 제도도 벌써 폐기 처분했어야 옳았지만, 신기하게도 거기서만큼은 ‘영화는 상품이기 전에 문화’라는 논리를 들이댔다. ‘시장 논리’라는 게 코게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스스로도 그 논리적 모순을 모르지 않았던 영화 시장의 기득권자들은 스크린 독과점이 시장 논리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문제가 없지 않으므로 영화계 주체들의 ‘자율적 조절 기능’에 맡기는 게 좋다고 슬쩍 비껴 갔다. 이런 논리는 결국 이 문제를 좀더 강력한 제도적 장치로 개선해보겠다는 강경론자들의 입을 막기 위함이었고, 결과적으로 자율 조절론은 힘을 얻었다.
연초 차승재 제작가 협회장은 제작자들 스스로 과도한 스크린을 잡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율 조절론의 실천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니 필연적으로 그 약속이 지켜질 리 없었다. 지난 여름 <디 워>가 600개 이상의 스크린을 싹쓸이 했고, <화려한 휴가> 역시 한 주 앞서 500개 이상의 스크린을 독식했다. 한국영화의 부진 앞에 일단 스크린 독과점 논쟁을 접어둔 언론들은 한국영화의 부활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영화가 국가주의나 애국주의와 만나는 순간에는 그 어떤 문제 제기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사이, 스크린 독과점과 영화 시장의 자본 악순환 구조를 타개할 정책적, 제도적 장치에 대한 논의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영화가 다시 문화가 되기 위해선
이제, 시장 논리와 영화인들의 자율적 조정력이 야기한 2007년의 영화 시장을 돌아 보자. 제작자든 투자자든 참혹한 상처를 입으며 패퇴하고 있다. 허리 끈을 더 바짝 졸라 맬테니 제발 투자해달라는 제작자들의 읍소가 처연하게 들릴 정도다. 심지어 투자-제작의 고전에도 불구하고 홀로 승승장구해오던 상영업마저 장사가 안 된다며 아우성이고 관객들은 볼 영화가 없다고 지청구다.
폐허와도 같았던 2007년을 보내는 즈음에, 영화 시장의 주체들은 한가지 중요한 명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서비스 상품이기 전에 관객들의 정서를 파고 드는 예술이며 동시대의 시민들이 그 정서를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한 매체이다. 그것이 연간 매출액 1조 원에도 못 미치는 이 작은 시장에 그 많은 언론들이 관심을 쏟고 정부조차 따로 진흥 기관을 두는 이유이다. 그것이 노골적인 광고 목적에도 불구하고, 배우나 감독들이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영화 홍보를 늘어놓더라도 눈감아주는 이유이다. 유리할 때만 그런 암묵적인 합의를 십분 활용하면서도, 정작 돈을 버는 순간에는 ‘영화는 상품이며 고로 시장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순이며, 고로 자가 당착의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이제 관객들조차 더 이상 영화를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돈 냈으니 낸 돈만큼 보여달라고, 그러지 않으면 평점 권력을 동원해 처절한 복수와 응징을 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는 시대다. 영화평과 화장품 사용 후기가 다르지 않은 시대다. 영화를 복권시키는 길은, 영화가 영화로서 대접받는 ‘구조’를 세우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영화인들 스스로 영화의 정체를 다시 아로새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12월 6일자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에 기고한 글입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도쿄에 가본 건 스무 차례가 넘을 것 같다. 일 때문에, 혹은 그냥 놀러, 한 해에도 두 세 차례 씩 방문해온 도쿄는 어느 순간부터 내게 옆 동네와도 같이 친근하고도 편안한 도시가 됐다. 처음엔 한꺼번에 수 백 명의 시민들이 교차로를 가로지르는 시부야 거리의 모습이 엄청난 진풍경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거리에 서면 마치 명동에 온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신주쿠 뒷골목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헤매 다녔지만, 이제 그곳에 가면 단골 음식점을 찾듯 소문난 라멘 가게를 찾곤 한다. 방문할 때마다 도시의 느낌이 시나브로 바뀌어 간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그 공간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젠 새로움을 찾는다기 보다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게 내가 도쿄를 찾는 이유가 됐을 정도다.
그런데 도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익숙하게 다가오는 대상이 하나 있다. 바로 도쿄 타워다. 여기서 익숙함이란 앞서 말한 친근함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심드렁함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길에 언제나 만나게 되는 도쿄 타워를 바라보며 나는 별반 특별한 감흥을 얻은 적이 없다. 그냥 여느 대도시에나 우뚝 서 있을 법한, 그런 도시적 상징물이라는 것 외엔. ‘파리의 에펠 타워를 너무 벤치마킹했군’, ‘여하튼 일본 사람들은 서구적인 걸 좋아해. 저 특징 없는 탑을 왜 만들었을까’ 정도가 도심 안에 불쑥 솟아 있는 그 생뚱 맞은 철탑을 보며 든 생각의 전부다.

여행자의 시선은 이방인의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대상의 표피에만 머물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여행은 영화가 담지 못하는 삶의 구체성을 목격할 기회를 준다. 반대로, 영화가 여행에서 얻지 못한 통찰을 선사할 때가 있다. 내게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는 그 공간을 ‘구체적으로’ 살아온 이들의 마음에 비친 도쿄 타워의 이면적 의미를 되새길 기회를 줬다. 그리고 다음 번에 도쿄에 가면, 꼭 한번 그 탑에 올라가 보기로 결심했다.
*여행 잡지 '트래비'에 기고한 글입니다.
스릴러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은근히 반전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브라이언 싱어의 걸작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뒷통수를 세게 때리는 의외의 반전이 영화 말미에 멋지게 기다리고 있다면, 설령 앞서 살짝 지루함과 짜증을 느꼈던 관객이라도 흔쾌히 면죄부를 발행한다.
사람들이 반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예상대로 흐르는 이야기가 지루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삶은,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돌발 상황의 연속이라는 것을 직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지금의 상황을 좀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 놓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혹은 거꾸로 반전에 의해 상황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급회전하게 되더라도, 그 또한 삶의 단면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불행의 반전은 행복이고, 가난의 반전은 부의 획득이며, 사랑의 반전은 이별이 될 것이다. 불합리한 세상에 구역질이 난다면, 우리는 좀더 거시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정 부패의 반전은 정의와 양심이며, 독재의 반전은 민주주의이고, 분단의 반전은 통일이다.
<마이클 클레이튼> 토니 길로이, 2007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원제 STORY, 황금가지)에 따르면, 반전의 쾌감은 기대와 결과 사이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증대한다. 때문에 가장 큰 반전은 영화의 절정부에 자리잡기 마련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흐름을 일순간에 전복시킴으로써 관객을 얼얼하게 만들기 위해선 결말 직전에 반전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까닭이다. 최근 개봉한 <세븐 데이즈>나 할리우드 영화 <마이클 클레이튼>은 이같은 반전의 미학을 비교적 훌륭하게 구사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런 드라마틱한 반전의 미학을 굳이 영화에서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세상이 온통 반전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대선이 결말 직전, 즉 절정에 이르면서 'BBK 주가 조작 사건 수사 발표'라는 의미심장한 반전이 예고되고 있다. 한쪽에선 싱거운 반전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한편, 또 한쪽에선 그것이 지금까지의 흐름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초강력 반전이 되기를 노골적으로 고대하고 있다. 기대와 결과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반전의 효과는 증대될 게 분명하다. 감독을 맡은 검찰이 어떤 반전을 준비했을까, 숨이 꼴깍 넘어간다. 계약서와 도장이라는 '복선'이 이 반전에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 조마조마해진다.
<닉슨> 올리버스톤, 1996
대선이 반전 스릴러를 닮았다는 것은 씁쓸한 노릇이지만, 동시에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한 나라의 권부를 결정하는 일을 불과 몇 십일 앞두고 거대한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올리버 스톤의 <JFK>나 <닉슨>을 능가하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정치 스릴러가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매일 뉴스를 통해 중계되고 있다.
아무래도 지난 2002년부터 대한민국 대선은 반전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국민들에게 흥미진진한 볼거리와 역전의 드라마를 함께 선사하겠다는, 위정자들의 엔터테이너적 발상이 이토록 가상한데, 누가 이번 대선을 재미 없다 나불대는가.
이 흥미로운 반전 스릴러의 최종 결말은 12월 19일 알 수 있다. 다만, 유권자들이 그 순간의 반전을 연출할 '감독'이 될지, 결말을 관조할 '관객'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최고의 반전이 아니겠는가.
<새벽의 황당한 저주> 에드가 라이트 감독, 영국, 2004
내가 사는 동네는 꽤 유명한 학원가 밀집 지역이다. 약 1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 양쪽에 빼곡하게 학원들이 들어차 있다. 간혹 인적이 드문 늦은 밤 거리에서 호젓한 산책을 즐기곤 하는 나는, 부지불식간에 학원가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당황하곤 한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갑자기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학원 수강생들의 인파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고교생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중학생들이다. 그리고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가 아이 티를 벗지 못한 학생이나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끼어 있다.
자라나는 꿈나무들을 '좀비'에 비유했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내 눈에 가끔 그들은 좀비(살아 있는 시체)처럼 보일 때가 있다. 새벽 1시가 넘는 시각에 집이 아닌 학원에서 공부를 한 뒤 떼로 학원 버스나 부모가 몰고 나온 승용차에 실려 귀가하는 중고등학생들의 모습은, 도저히 내가 가진 '상식의 영역'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래서 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침 8시 등교라면 적어도 7시엔 일어나야 할텐데, 집에 가서 씻고 어쩌고 하면 2시에나 잠들텐데, 그러면 5시간도 못자고 학교에 가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 본 TV 시트콤에서 학원에 와서 졸고 있는 학생에게 강사가 "너 학교에서 뭐 하고 학원 와서 자!"라고 호통 치는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통찰적인 대사였던 셈이다.
지금 사교육의 팽창이 어느 지경까지 와 있느냐를 교육 현실의 구조적 모순과 연계해 시시콜콜 따지고 있는 일은 멍멍이 귀에 맹자왈 공자왈 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이니, 과문한 나까지 가담할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다만 이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나는 제 정신이 아닌 것을 넘어 미쳐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눈 맑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을 새벽 거리의 쾡한 좀비로 만들고 있는 현실이 무섭고 식겁할 뿐이다. 얼마전에도 한강 남서쪽 좀비들의 반란이 신문 지상을 뜨겁게 달궜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채택하지 않은 교육 주체들의 사고 체계에는, 이기느냐 지느냐, 밟느냐 밟히느냐, 목소리를 키우느냐 줄이느냐, 미느냐 밀리느냐, 붙느냐 떨어지느냐의'정글 함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니 별 일 아니라고 치부해 버리면 속 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무섭다. 이런 상황이 내일도 계속될 것 같기 때문에 무섭다. 쾡한 눈으로 새벽을 지새운 결과,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을 유일무이한 생존 원리로 체득하게 된 꼬마 좀비들이 미래의 권력을 쥐게 될까봐 무섭다. 그래서 훔치고 떼먹고 속이고 말바꾸기로 일관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글 법칙의 달인들, 죽여도 죽여도 선거때마다 되살아나 비치적거리며 걸어오는 저 늙고 흉측한 좀비들의 유전자를 상속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사랑은 김치와 같다. 익어야 제 맛이다. 물론 겉절이 좋아하는 분들 계시겠지만, 삭힌 홍어의 맛을 아는 자만이 삼합을 논할 수 있는 것처럼, 익은 사랑의 맛을 아는 자만이 삐리리의 순간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선언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이 익기 위해선 얄궂게도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삐리리의 전류가 흐른 뒤, 초보 연인들에겐 시련이 닥친다. 그 시련은 여러가지 양태로 사랑의 숙성 과정을 끊임 없이 괴롭힘과 동시에 숙성시킨다. 아이러니지만 그렇다. 고통은 사랑을 방해하고 한편으로 돕는다.
우리가 여러 매체를 통해 가장 많이 보는 고통의 사례는 바로 양가 부모의 반대다. 흔히 TV 드라마에서 상투적으로 써 먹는 설정이다. 요거 좀 낡았다. 요즘 세대 부모가 반대한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거대한 유산에 신경 쓰는 마마보이, 마마걸들이라면 모를까. 게다가 부모들도 개화돼 애들 연애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시기는 지났다. 오히려 서른이 넘도록 시집 장가 못가고 있는 자식들 등 떠민다. "길거리에 치이는 게 여자고 남자인데, 넌 그 흔한 연애도 못하고 뭐하니, 이 화상아!" 혹은 "아무하고나 빨리 좀 가라!" 심지어 이미 혼인한 자식에게 간혹 새 삶을 종용하는 급진적인 부모들도 적지 않다. "김서방 못쓰겠더라. 이혼해라." 그러니 이런 설정, 영화에선 안 쓰는 게 지당하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건과 첨예한 갈등의 사례를 통해 삶을 은유하는 매체다. 부모님 반대는 요즘 사건도 아닌 것이다.
또 한가지 흔한 것. 실 생활에서도 아마 가장 흔한 고통일 것이다. 성격 차이다. 요거 별 것 아니겠지만 쥐약이다. 양식 먹고 싶은데 일식 타령하고, 지하철 타자 하면 버스 타자면 처음엔 그래 그래 하다가도 은근히 짜증이 돋는다. 잠 잘 때 사랑해, 아침에 일어나서 사랑해,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해 들어야 되는 여자에게 무뚝뚝한 남자는 천벌이다.
흔하고 흔한 게 성격 차이니 이건 로맨스 영화의 고통 소재로 삼기엔 함량 미달이라 생각하시면 오산이다. 말 된다. 왜? 알콩달콩의 드라마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로맨스 영화들은 현실적인 관계들을 선호한다. 부모님 반대, 그딴 낡은 거 아니라면 성격 차이로 인한 티격태격은 재미 있다. 무엇보다 웃음을 줄 수 있다.
가장 많은 로맨스 영화에서 등장하는 고통의 설정은 무엇일까.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불치병이다. 그만큼 사랑의 숭고함과 영원성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기에 불치병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만 해도 <선물> <국화꽃 향기> <내 머리속의 지우개><사랑하니까 괜찮아> 등 신파 멜로물의 단골 소재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게 또 이 불치병이다. 그런데 왜 불치병은 하필 여자가 걸릴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 그렇다. 항구가 병이 들면 배는 옴짝달싹 못한다. 그게 순리다. 말 안된다고? 좀더 실질적인 이유를 대볼까? 멜로 영화의 주 관객층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감정이입을 유발하기 위해선 병든 남자보다 병든 여자가 더 설득력 있다.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할 이의 입장이 슬픈지, 사랑하는 이를 남기고 떠나야 할 이의 입장이 슬픈지.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고통은 사랑의 이음동의어다. 고통에 굴복하면 사랑은 신기루가 된다. 극복한다면? 글쎄...조용히 곁에 찾아온 그 무엇이 일상의 매 순간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놓고 있음을 깨닫게 되겠지.
영화 <씨클로>를 봤던 기억이 난다. 96년이었던가, 방송국의 스포츠 뉴스 AD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매일 밤 생방송을 위해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었던 차에 하루는 PD를 맡았던 선배가 제안을 해 왔다. 방송을 세 시간 여 남겨 놓고 갑자기 <씨클로>를 보러 극장에 가자고 하는 게 아닌가. 마침 저녁 경기가 없었던 날이었으므로 방송 준비는 대충 마무리 돼 있었던 지라 흔쾌히 선배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회사에서 약 10분 거리에 떨어진 극장에서 마지막 회 입장권을 사 <씨클로>를 봤다.
씨클로, 1995
중경삼림, 1994
화양연화, 2000
무간도, 2002
영웅,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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