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인간들은 다르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대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사는 곳도 다르고 먹이도 다르고 천적도 다르고. 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거야.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창비
지난주말 내 생애 처음으로 등산이라는 걸 했다. 물론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장난 삼아 뒷산에 오른 적은 있으나 등산화에 배낭까지 소위 '장비'라는 것을 갖추고 정상까지 기어올라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40-50대 중장년층에게 이미 '패션'이 되다시피한 그것을, 나는 바로 그런 이유로 약간은 경외시했던 게 사실이다. 산에 오르면, 나도 중장년이 돼버리지 않을까 하는 괜한 부담감. 어쨌든, 헉헉 대며 산길을 오르는데, 길은 길인데,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길인지 모호했다. 워낙 돌이 많고 산세가 험해서였지만, 나는 그저 '오른다'는 행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상에 다다랐을 때 얻은 시야의 해방감은, 그 행위의 수고로움을 일거에 보상해주었지만, 숨이 턱 밑에 차 올랐을 즈음에, 산을 오른다는 목적 의식은 사라지고, 그저 1미터 앞의 돌덩이를 어떻게 기어 올라갈 것인가만 남는다.
은희경의 신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내게 그런 기분으로 읽힌 소설이었다. 저자는 탁월한 이야기 꾼임에 분명하지만, 정상을 가늠하며 유유자적 걷는 편안한 산행을 허락하지 않는, 돌산과도 같다. 그래서 이 숲을 벗어나 얻게될 선명한 상(像)의 쾌락을 확신하지 못하게 한다. 쉬운 문체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요즘 유행하는 일본소설의 대중화법적 미덕은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아마도 나중에 한번 더 읽어 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강박적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된다(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독자의 과문함을 깨우치는 은희경은, 여전히 그 안의 다름을 추구하며 진화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기대했던 상(像)을 얻지 못해도 그가 안내하는 다음 봉우리를 넘어가봐야 되겠다는 클라이머의 치기를 자극한다. 이번에도 그 정도에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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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7/19 서로 다른 존재만이 공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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